2020927일 일요일, 맑음


그제 금요일에는 손톱 밑이 아리도록 마늘을 쪼갰고 어제는 조각조각 갈라놓은 쪽마늘을 땅을 파서 폭~ 깊이 심어주고 흙으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너무 낮게 묻으면 어니께 폭폭 묻어 주라"는 드물댁의 말이지만 '처마 밑에 매달려 겨울을 나는 마늘도 봄이면 보드랍게 싹이 나더만...' 아무래도 농사에 어리숙한 내가 그미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재미진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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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미는 아침도 먹기 전에 올라와서 마늘 심자고 불러내리는데 전날 전목사한테서 받은 수기치료로 아직도 기운을 못 차려('큰딸' 말로 자기는 그런 치료받고 나면 사흘은 앓아눕는단다)일을 하기 싫었지만 주인과 함께가 아니면 일 않는 걸 신조로 삼는 드물댁이기에 텃밭으로 내려갔다.


마늘을 심고 있으니 이장의 스피커 쇳소리가 아침부터 끊어지질 않는다. 함양군에서 코로나 지원금이 1인당 10만원씩 나왔는데 5만원은 현금으로 통장에 넣어주고 5만원은 함양 지역화폐로 준다고 회관에 나와 통장번호를 대란다. 아마도 올해 함양산삼엑스포를 한다고 예비비를 어지간히 책정해두었다가 코로나로 엑스포는 못했고, 그래도 돈은 써야겠고, 해서 코로나 확진자가 6명이나 발생한 터라, 군민들에게 위로금쪼로 저 돈을 주나? 이유 없는 돈을 받자니 맘이 꺼림칙해서 나 혼자 저 돈의 출처를 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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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를 들고 드물댁은 고랑 저쪽 끝에서, 나는 이쪽 루콜라 심겨진 고랑에 마늘을 심기 시작하려는데 이장의 방송이 다시 나온다. "마을회관, 안노인들 방 보일러 다 고쳤으니 새로 한 싱크대 정리하러 아짐들 빨리 나오쇼." 드물댁이 내 눈치를 보기에 어서 다녀오라니까 바람처럼 쌩~ 하니 내려간다


두어 시간 후 다시 올라와 나랑 마늘 두어 줄 심고 있는데 이번엔 마을회관에서 찌짐 굽는다는 방송이 나오자 나더러 같이 회관에 가잔다. "나는 찌짐 안 먹으니 어여 다녀오세요." 했더니만 이번에도 번쩍 번개불 처럼 사라진다. 저런 작은 모임들이 아짐들의, 어쩌면 유일한 기쁨이다. 내가 만든 반찬을 나눠주어도 그미는 꼭 회관에 들고가서 함께 나눠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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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도 아프고, 멀칭한 이랑에 900개의 구멍을 후벼파고 그 수만큼 마늘을 박고 흙을 덮어갈 생각에 괜히 맘이 심란해져서 일손을 놓을까 했지만 서울친구더러 휴천재에 심겠다고 통마늘까지 보내게 한 터라 두럭에 쭈그리고 앉아 심고 또 심었다.


한 시간 있다 다시 올라온 드물댁은 호박찌짐 맛은 얘기 않고 아짐들 쌈얘기만 스포츠방송처럼 신나게 들려준다. 아짐들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주로 싸우는데 관전평이 시비를 가리는데 중요하기 때문일 게다. 용수막댁하고 담이 붙은 세동댁이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는 오늘의 스포츠. 도둑도 없는 시골이고 앞뒤옆집으로 서로 얽힌 친척들이어서 앞울타리도 대문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옆집과의 울타리는 별나게 높이들 쌓아둔 집들이 있다


한반도와 섬 일본이 가까운 게 탈이듯이, 다툼은 주로 옆집과 옆집 사이에서 발생하나 보다. 그래도 이웃에 큰일이 나면제일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옆집들임을 우리는 안다. 나는 반 쯤 심다 점심밥하고 읍내에 가야 한다며 올라오고, 딸이 다니러 왔다며 집에 내려갔던 드물댁은 해질녁에 다시 올라와 마늘씨 그릇을 비우고서 허리를 편다. 뚝심 좋은 아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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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는 장도 보고 보스코 머리도 깎고(화요일에 어느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러 온단다꽃무릇이 지기 전에 상림도 보자고 읍에 나갔다. 시골에 살면서 이웃 마실이나 읍내 외출은 언제나 '다목적 외출'이어야 한다. 서울 나들이도 그렇다. 


다가오는 추석을 생각해서 장터와 슈퍼들을 둘러보며 채소를 살펴보니 모든 푸성귀가 너무 비싸 추석까지는 집 텃밭에 있는 것만 거둬먹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금년 추석에는 우리 조상님들 젯상이 참 소박해질 듯하다. "사랑하는 며늘아가, 우린 내년 추석에나 보자!"라는 마을 입구의 현수막이 서로 웃자는 것인지 어르신들 씁쓸한 심경인지 뭔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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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숲에 가보니 숲속 그늘 꽃무릇은 다 졌고 연밭 곁으로 햇살이 짧은 구석에만 꽃무릇이 일부 남아 있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연밭을 메우고 심은 메밀은 긴 여름장마에 아예 녹아버려 보는 사람마다 군수한테 얼마나 욕을 해댔던지 서둘러 메밀을 뽑아낸 모래밭에는 포트에서 키워낸 외래종 꽃만 또다시 서둘러 심어놓았다


전임군수가 15년 넘게 마련한 보기좋은 연밭을 다 갈아엎고 가을 엑스포에 메밀꽃을 보여주겠다던 군수의 뻘짓도, 올림픽하겠답시고 일본국민을 코로나에 통째로 넘겨버린 아베의 속셈도 무위로 끝났다. 세상이 인간의 야심만으로는 안 되고 천심과 민심에 달렸다는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의 이치를 배웠다면 다행일 텐데. 그것도 모르는 게 정치인들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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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요미의 주선으로 '은빛나래단'9월 모임을 추석맞이로 겸해서 오늘 가림정(佳林亭) 임신부님 댁에서 가졌다. 주일미사를 드리고서 가까운 '남사 예담촌' 어느 한식집으로 가서 점심을 했다


'남해 형부'는 지난번 추석 선물로 우리에게 보내준 멜론이 맛이 없었으리라면서, 남해의 아침 시장에 나가 싱싱한 아지를 사와 산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골고루 안겨주었다. 그분의 넉넉한 인심으로 우리 산사람들은 푸짐하게 바다 맛을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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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형부의 비접을 빼내주는 임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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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형부는 예전엔 큰 물류회사에서 구매부장으로 상품 보는 눈을 갈고 닦아 좋은 상품을 찾아내는데 남다른 안목이 있었는데 '이번 멜론 고른 솜씨를 보니 나도 촉이 퍽 떨어졌나보다'고 탄식한다.그래서 지금은 어부로 등극했다. 우리의 모임에서 그분의 유모어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은 모두가 탐낼 만하다. 그 부부는 '주어진 시간에 가장 행복한 일을 찾아내서 최대한으로 누리는' 품성이 탁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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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일에 생일을 맞은 시우가 친구와 집에서 하루를 지내는 사진을 보니 애들은 쑥쑥 잘도 큰다스위스에서는 우리의 옛시절처럼 아이들이 친구집에 가서 함께 먹고 자는 놀이를 좋아하고 부모들도 자주 그런 자리를 마련한단다


빵고신부가 오늘 사촌누이 미선네를 찾아간 사진을 올렸다시우와 동갑인 은율이를 보니 제 어미와 똑같은 얼굴인데 키는 훌쩍 더 크다아이들 크는 모습에서 우리는 가을의 결실을 본다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이제 우리가 낙엽 지며 떠나도 손에 들려진 씨앗은 다음해 봄을 채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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