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3일 수요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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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자기 가을이 왔다. 얇은 누비이불이 추운지 바짝 웅크리고 자던 보스코가 먼저 이불을 갈잔다. 여름이 가는지 가을이 오는지도 모르고 무신경하던 그가 갑자기 이불 얘기를 하니까 사노라면 사람이 바뀌는가?’ 싶다. 3층 다락방에 올라가 오리털 이불을 가져다 시트를 갈면서 창밖을 보니 감잎도 실바람에 뚝뚝 떨어진다


흑성병이 걸린 감잎에 따라 열매마저 거뭇거뭇 얼룩져 떨어지고 만다. 마을을 돌면 감나무마다 약간 불그레해서  떯어진 감들로 수북하다. 감농사도 망친 한 해다. 텃밭 끝에 심은 단감 두 그루도 초여름엔 제법 열렸던 열매들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가을이지만 추수의 낭만은 멀기만 하고 을씨년스런 삶만 엉거주춤 감나무 밑에 나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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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걸려와 정신이 번쩍 든다. 희정씨가 떡보영감대사님 드리라고 읍에서 휴천재까지 달려와 우리 식당채 식탁에 떡을 살짝 놓고 한참 가다가 전화를 한 길이다. 일이 바빠 수동으로 가는 중이란다. 보스코와 동갑인 친정어머니가 무릎수술을 하셔서 회복기 동안 자기 집에 모신다니 그일만으로도 무척이나 바쁠 텐데 우리까지 챙기는 모습에 감동이다


서울집 집사로 살던 자훈이 어머니가 금산에서 추석 선물로 수삼을 한 상자 보내왔다. 수삼을 아홉번 찌고 말리면 홍삼이 된다. 보스코가 아침마다 홍삼차 한 잔을 마시는 건 30년 넘은 그의 건강비결이다. 비록 코로나 청정지역이 끝나고 양성판정을 받은 감염자가 여섯이 나왔어도 함양에 살러 오길 잘했다. 이처럼 다정한 지인들이 주변에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 환자가 함양에도 발생하자 택배기사나 우체부 아저씨도 우편물과 택배물을 가져오면 저 멀리서 거리두기요!” 외치며 가까이 오지마세요. 여기 두고 갑니다.”라며 현관이나 휴천재 입구에 세워진 자동차 보닛 위에 물건을 놓고 쌩하니 가버린다. 함양에 코로나 감염 경위에 택시기사가 한몫을 한 탓에 기사들이 저렇게나 마음을 쓰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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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성경(레위 13,45-46)에까지 나병환자는 멀리서라도 사람 소리가 나면 얼굴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치라고 정해 놓았던 한심한 시대가 다시 온 듯하다. 이러다간 코로나보다 조금 쎈 전염명이 돌면 확진자는 나 전염병자요!’ ‘나 전염병자요!’라고 소리지르는 게 법적인 의무가 되거나, 히틀러시대의 유태인처럼 가슴에 노랑색별을 달고 다녀야 하거나, 얼룩말 죄수복을 입고 돌아다녀야 할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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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댁이 내게 전수하는 도토리묵 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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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동네 아줌마들은 산비탈을 헤매며 알밤(도토리)과 꿀밤()줍기에 여념이 없다. 예전엔 먹을것 귀해서 너나없이 산을 더듬었다지만, 평지도 걷기 힘든 아짐들이 많아지자 그래도 무릎이 덜 아픈 젊은것들에게 도토리 수확이 집중되었나보다. 덕촌댁이 알밤을 많이 주웠는지 나에게 은근한 제안이 왔다. 도토리 주운것 두 되 줄게 화계 방앗간에 좀 같이 갔다오잔다. 도토리 묵가루 내는 법도 가르쳐준단다. 그래서 선뜻 따라나섰다. 임실댁도 자루를 싣고 같이 갔다.


로마에 있던 대사관저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서너 그루 있어 가을이면 도토리가 두세 가마니는 떨어졌다. 관저 요리사들은 도토리를 믹서기로 갈고 앙금을 갈아앉혀 묵을 쑤면 로마에서 공부하는 사제들과 수녀들 대접에 정성을 쏟았는데... 오늘 내가 다시 도토리묵의 달인들에게 사사를 받게 되었다.


대사관저 100여년 됐을 상수리나무를 나는 '영감님'이라고 경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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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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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 방앗간에는 도토리 자루가 기다란 줄을 서 있어 지리산 도토리들이 몽땅 방앗간으로 왔나보다. 얼마 전 보스코가 내게 보여준 사진이 있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수도 없이 파서 구멍마다 도토리를 저장하는 사진이다. 그렇게 저장한 창고를 습격하는 얌체 딱따구리 패가 있는가 하면, 그런 싸움이 나면 수십마리 딱따구리가 쌈구경을 온다는 얘기도 나한테 들려주었다. 아줌마들이 집집이 도토리를 자루째 숨겨 두었다가 방앗간으로 들고온 참이었다.


나는 도토리와 방앗간에 예의를 다하기 위해 꽃무늬 원피스에 더 화려한 꽃무늬 앞치마에 향수를 뿌리고 귀고리마저 달았다. 보스코가 놀란 눈이다. '당신 어디가?' '방앗간에.' '누구 만나러 가?' '아냐 그냥!‘ 방앗간에 줄선 아줌마들도 샌프란치스코에선 머리에 꽃을 꽂는다오라는 노래 가락을 듣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샌프란치스코에서는 모르겠지만 유럽에선 머리에 꽃을 꽂는다는 말은 '살캉 갔다'로 통한다, 집시 여자라면 모르지만). 그래도 뒷산 염소막에 가며 하이힐을 신지는 않는다.


실버타운을 가면 왕년에 한가닥했다는 분들일수록 식사시간마다(사람이 모이는 건 그때뿐이니까) 새옷으로 얌전하게 차리고 나오는 광경을 보고 슬며시 웃곤 했는데, 그러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면 너나없이 잠옷에 가까운 차림으로 복장이 통일되곤 했는데, 사실 시골살이 15년차 모든 것에서 풀려나니까 무엇을 걸치든 아무 거리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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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오가는 길가에 흐드러진 코스모스, 바람에 온 몸을 풀어내는 억새의 몸춤이 살아있는 나날의 선물이다. 보스코는 요며칠 전기톱을 갖고 신나게 논다. 그제는 휴천재 정자 밑의 뽕나무와 석류나무를 뿌리까지 전기톱으로 베어냈고, 식당채뒤 매실나무 가지를 여나믄 개 잘라 내어 택배차 지붕에 걸리지 않게 조처하였고 서쪽 마당의 매실나무도 가지치기를 하였다.


오늘은 달포 전에 자기가 잘라낸 독일가문비나무 가지들과 그제 잘라낸 나무들을 전기톱으로 일일이 토막내어 감동 창고에 차곡차곡 쌓는다. 먼 훗날 살레시안들이 청소년들을 데려와 지내면서 캠프파이어 할 때 쓸 거란다. 우리가 만난 일 없을 젊은이들 얼굴이 요새 우리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공작꽃 송이들처럼 휴천재 마당에서 환하게 빛나는 날들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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