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26일 일요일, 맑음


이번 서울 나들이는 계획에도 없던 이빨 치료에 시간의 대부분을 내주었으므로 삶이 계획대로 안 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보스코가 자꾸 오후에는 미열이 있고 아침에는 정상인 나날이 반복되는 걸로 보아 사흘간 이어진 잇몸 치료가 많이 힘 들었나 보다. 그래도 그 나이에 임플란트 하나 안 하고 자기 치아로만 살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복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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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저녁 우이천 산봇길: 어미는 다큰 새끼들도 끝까지 보살피나보다일기장20200724_192902.jpg


토요일 오전에 보스코의 마지막 치과방문을 마치자 그 길로 드디어 휴천재로 돌아오는 길, 정말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래도 아프면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벌써부터 마음이 답답하다. 시골 사는 것도 중독이다.


운전해 오는 도중에 오빠가 전화를 했다. 태백에서의 행복한 주말을 보내는 중인데 드디어 011 핸드폰을 010으로 바꿨단다. 24년간 쓰고 그 회사에 요금으로 낸 돈이 2400만원 정도는 족히 되는데 아까워 계속 쓰려고 ‘2G종료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 행정법원에 냈는데, 기각결정을 받았단다. 대신 140만원짜리 핸폰을 80만원 지원해 주고 60만원을 내니 5G 제일 좋은 것으로 준다는데, ‘쓸데없는 성능이 너무 많아 배우려면 골치아플 꺼라니까 성능이 간단한 16만원 짜리는 공짜로 준다더란다. 그래도 그럴 순 없었단다. 하여튼 새 핸폰을 지닌지 사흘간 어찌나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잠이 다 안 오더란다. 나이 74세에 새로운 문화의 기로에 서있는 오빠가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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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과 북한산을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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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밤엔 뭔가를 만졌는데 화면이 새까매지는데 기계를 망가뜨린 줄 알고 밤새 고민하다가 이튿날 미선이에게 보여 주니 화면밝기를 올리니까 확 살아나는데, 똑똑하다고 생각해온 자기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아보이던지...  ‘그렇게 힘들면 걱정 말고 나한테 말하면 내 것과 바꿔 줄 게.’ 하니까 그럴 사람은 벌써 줄을 섰단다. 아무튼 석 달 고생해서 배우면 평생에 도움이 되리라는 친구의 격려에 필사적으로 핸폰을 배우고 있는 오빠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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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쯤에서 신신부님 전화를 받아 청주에 잠깐 들러 KAL 858 대책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20년 넘게 그 비극적 사건의 진상을 유족들과 함께 파헤치는데 오로지 헌신하는 신부님이다. 한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역사도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집요하게 진실을 파헤치는 선구자들의 희생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5482

https://dgmbc.com/KAL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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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쯤 휴천재에 도착했는데, 부엌과 식당엔 오랜 장마로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었고 맨발로 걸었더니 발바닥도 까맣게 된다. 밭에 나가보니 올망졸망 달렸던 참외가 잎을 다 떨어뜨려 꾀벗고 있다. 고추도 가지도 도마도도 터져 있고 오이만 제철을 만나 장마철 오이 크듯하는 중. 루꼴라도 상추도 다 녹아버려 흔적조차 없다.


오늘은 미루네랑 임신부님댁에 가서 주일미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남해 형부가 전어가 잡혔다, ‘이사야가 전어회 먹고 싶다 했다고 점심에 전어를 갖고 산청으로 오신단다. 넉넉한 언니가 반찬이랑 밥까지 다해서 싸들고 오시니 나야 국이나 끓이고 후식 준비가 전부다. 온갖 채소가 밭에 가득한 임신부님댁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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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 연중 17주일 미사를 거행하시고 이어서 아가페 오찬이 벌어졌다. 전어회 무침에 호박나물 오이나물 열무김치 고구마줄기김치 된장국 고추와 된장... 부러울 게 없는 식탁이다. 언제나 느끼는건데 우리 식탁에서 제일 풍요로운 건 모니카 언니의 커다란 웃음소리다. 아무리 우울하고 힘들어도 언니의 웃음소리는 그 모든 음습한 기운을 단방에 날려버린다. 그래서 웃고, 따라서 웃고 하다 보니 다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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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방곡입구 논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있는 전태평씨 부부를 발견하고 차를 멈추고 농원에 들어가 얘기를 나누었다. 남해형부가 집집이 나누어준 전어를 저녁식사에 구워먹으라고 그들에게 선물했다. 시골생활이 중독되는 이유 하나는 스스럼 없는 나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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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마자 내 오기가 발동. 완전무장을 하고서 감동 옆 공터로 가서 풀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어제 오늘 운전을 했고 오늘은 주일이니 하루쯤 기다리라는 보스코의 립서비를 무시하고 두세 시간 땀을 흘렸더니 오히려 개운하다.


주인이 바뀐 저 윗집에 인기척이 있더라는 보스코의 말에 저녁을 먹고나서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을 만나 볼겸 산봇길에 나섰는데 차도 사람도 가고 없었다. 인규씨의 말로는, 부산사람이 부인이 아파서 요양차 집을 샀다는데 주말에만 오갈거라더란다. 이웃으로 좋은 사람이 오기를 바랬는데 만나기가 수월치 않겠다. 지리산이든, 남해든 귀촌해 살아보면 좋은 사람은 많아도 뜻맞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탄식이 오늘 우리 은빛나래단의 결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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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봇길에 저 25년전, 아랫집 유치원생 진호가 한겨울에 수영하던 골짜기 웅덩이를 돌아오며 긴 세월 속에 아이들은 커서 진이처럼 아기엄마가 되고 진호처럼 어른이 되어 집에서 멀어져가도 우리 어른들은 떠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만 멀리 지켜보며 추억의 주변을 맴돌 뿐이어서 쓸쓸하다


그래도 동네 한바퀴를 돌아오는 길에 기욱이 엄마가 건네준 고사리 한 보따리, 인규씨 어머님이 주신 가지와 토마토와 한 봉지와 그 집 햇닭이 낳은 계란 두 알, 진이엄마가 나눠받아 우리한테 나눠 준 옥수수로 양손이 푸짐하니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위로를 삼는다. 문정리는 참 살 만한 동네여서 시골생활에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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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얻은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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