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23일 목요일, 하루종일 큰비


중국의 싼샤댐의 수위가 댐 끝까지 10m밖에 여유가 안 남았고 이 댐이 혹시 넘치면 4억명의 이재민이 나온단다. 이미 우리나라의 인구만큼 45백만의 이재민이 나왔다니 어쩌나! 더구나 이런 빗줄기가 한 달은 더 간다는데 중국정부는 속수무책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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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비오는 소리가 한없이 풍요로운 음악이다. 이미 지리산 휴천재는 언덕위에 있고 어느 핸가 태풍으로 휴천강이 넘쳐 국도까지 넘실거릴 때도 한남마을 담배가게 주변만 피해를 보았다. 그해 보스코를 인터뷰 하러 휴천재를 찾아오던 분도수도원의 고이삭 신부님과 지금은 아빠스가 된 박현동 신부님이 우리 마을 바로 앞에서 산사태로 길이 끊겨 그냥 자동차 안에서 인터뷰를 하고 돌아갔던 날도 내게는 큰비마저 부잡한 동네 말썽쟁이 아이 정도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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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물이 무서웠던 때가 딱 한번 있었다. 1977년 여름이었으리라. 우리가 광주에서 첫 직장생활 3년을 하고 상경하여 보스코가 서강대에 직장을 두었을 때였다. 모래내 북가좌동에 있는 어느 2층집 반지하에 세를 살고 있었다. 북가좌동은 옆에 흐르던 개천이 여름마다 넘치는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그해 여름 장마에도 개천은 넘쳤고 마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물은 겨울에 때려고 미리 사서 지하실에 쌓아둔 연탄 1000장을 아래로부터 주저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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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살림에 아끼고 아껴 사놓은 연탄이 곤죽이 되는 꼴을 나이 스물여덟의 새댁이 어찌 두고 보겠는가! 천둥번개에 동네 전기는 다 나가고,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1층 테라스로 사력을 다해 그 연탄을 혼자서 들어 날랐다. 400장쯤 날랐을까? 임신 4개월의 내 다리를 흘러내리는 뜨거운 점액질이 느껴져 그 길로 쏟아지는 비에 손과 몸을 닦으며 달려나가 정전 중에도 혼자서 빛을 발하며 도시임을 일깨우는 가로등 불빛 아래 몸을 비쳐보았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눈을 떠보니 병실 침대였다.


그렇게 빵기동생은 떠나고 이곳 우이동 집으로 이사 오기까지 몇 해를 기다렸지만 아기는 오지 않았다. 이듬해 78년 우이동으로 이사와서 빵고가 들어섰는데 그때도 수도가 없어 이층까지 동네우물을 퍼 나르던 극성에 하혈 기미가 있었다. 그토록 허약해진 몸에도 악착같이 탯줄을 움켜쥐고 버텨 준 아이가 빵고다. 아마 지금 수도원에서도 걔가 극성맞게 일을 해낸다면 엄마 몸속에서 살아남으려 하드트레이닝을 거쳤던 생존의 비법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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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이 큰아들과 트레치메를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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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미수리나 호수와 트레치메 봉우리는 나도 기억하는데(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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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 부부는 치과 주치의 곽선생을 찾아갔다. 스켈링을 대접받고 보스코는 잇몸 수술을 하고 앞으로 두어 번 치료를 더 받아야 한다는 처방이 나왔다. 월요일 정기 검진에서도 치열은 나쁘지만(그는 이빨이 세 줄로 나 있다!) 건강하고 건사를 잘하여 40대 정도의 치아라는 칭찬도 받았단다그런데 이빨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서 터진다. 치열이 고르고 하얘서 보기에는 좋은 내 이가 늘 문제다. 임플란트를 두세 개 다시 더 해야 한다는 소리에 기운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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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사제단이 집회의 명맥을 유지하는 기자회견을 가졌고 (우리가 지리산에서 올라온 이유 중의 하나도 사제단 미사에 참석하려는 생각에서였는데) 우리 부부도 첨석할 생각이었지만 치과 일로 시내에 못나갔다. 대신 '막내딸'이 성명서도 가져다주고 잔신부름을 하러 오후에 잠깐 집에 들렀다. 해방 후 민족주의의 정기를 늘상 말살시켜온 친일보수세력의 반격이 총선후 만만치 않게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서울 온 길에 오늘은 빗속에 낙성대에 있는 우정치과에 찾아갔다. 내 치아의 임플란트를 담당하는 곳이다. 문제의 이를 빼고, 심을 박고, 뼈를 심는데 왜 그렇게 처량한지! 지리산 산골에서 왔다고 단선생은 가격을 많이 빼 주었는데도 우환이 도둑이라고 내가 아무리 아끼며 살아도 도와주질 않는 치아의 치열과 휑한 빈자리를 거울에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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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에서 돌아오는 길에 답십리 하늘병원’ 1층에 있는 '보스코 젤라또'에 들려 김평안 신부님과 담당자를 만났다. 청소년들을 끌어안고 함께 나아갈 모든 길과 방법을 찾아 헌신하는 살레시안들의 기쁘게 사는 모습에서 오늘의 모든 우울함을 확 날려버렸다.


점심도 굶고 성치 않은 몸으로 빗속을 헤매는 아내가 안타까워선지 보스코가 덕대후문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마중나와 나를 맞아준다. 비는 여전히 물동이처럼 쏟아붓는데도 미소 짓는 그를 보자 내 마음은 맑음으로 갰다. 낙성대까지 오가며 전철 안에서 읽은 홍해리 선생님의 시집 이별은 연습도 슬프다에서 치매 걸린 아내를 10년 가까이 보살피는 노시인의 정성에서, 부부로 건강하게 해로하고 있음만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깨우침받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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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밭이라고 불 지르지 마라

막차가 끊기면 너 또한 막막하리니. (홍해리, “호사로다” -치매행 34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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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천 오리 한쌍, 빵기가 찍어보낸 알프스 에델바이스 두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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