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9일 목요일, 흐리다 비


작은아들을 몇 달만에 본다. 언제나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지만 늘 바쁜 사람이기에 전화걸기도 마음에 걸려 저녁이면 오늘 하루도 전화 않고 잘 넘겼구나스스로를 대견해 한다. 아빠의 생신을 축하해주러 내려오는 효도다. 아침 1030분에 동서울터미널을 떠난다고 연락을 했기에 시간을 보며 지금 어디쯤 왔으리라 미루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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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맞으러 함양읍에 나갔다. 보스코와 좀 일찍 나가 그는 이발소엘 가고 나는 집에 필요한 보도블럭(정자에 올라가는 디딤돌), 화분 , 여름상추씨, 간이 소독약통, 돌쩌귀 등을 샀다. 시장이 멀기 땜에 치부책에 필요 상품을 기록했다가 읍내 나가는 길에 장을 봐 와야두 번 걸음을 안 한다.


보스코는 몇 달 전부터 머리염색을 접었다. 지리산에서 주로 만나는 '은빛 날개단'들이 머리에 모두 흰눈을 이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하다 보니까 백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염색을 중단해서인지 걸핏하면 돋아나던 두드러기도 거의 잦아 들어 최근에는 온몸을 긁거나 약을 먹는 일도 없다


하기야 코로나 사태로 어디에 강연 나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으니, 특별강연에 초대받는 강사도 청중을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젊음을 보여 주는 게 도리라는(정육점 고기장사도 머리가 까매야 고기가 더 팔리더라는 이 아저씨 탄식대로) 내 설득에 여태까지 나에게 머리를 내맡겼는데, 강연 들어줄 고객도 없어지는 시절이니 지난 20여년간 그의 머리를 염색해주던 서비스를 나도 포기했다. 나이만큼의 흰 머리가 자연스럽다는 아들들과 손주들, 그리고 딸들의 평가에 이제 머리염색과는 영이별이요 이번엔 내가 포기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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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두시가 다 되어 도착했고 우리는 늦은 점심을 함께 하고 휴천재로 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아들이 없으면 휴천재가 외로울 텐데, 아들만 있어도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다.


빵고 신부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닥터하우스가 끝나간다고, 엘레나 파란테가 지은 나폴리 4부작 중 1'눈부신 나의 친구`2'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볼 수 있게 '왔샤''네플릭스'TV에 설치해 주었다.


책읽기를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하는 이탈리아 친구들이 영국인이 쓴 해리포터에 열광하는 전 세계 어린이들만큼이나 열광하더니, 한편에 8부작씩 만들어(연속극의 경우 미국은 24, 힌국은 16, 유럽은 8편을 만든다나?) 이탈리아 국민 전부가 그 연속극에 빠져들었단다. 나폴리 사람들의 엉터리없는 사랑스러움에 이번엔 우리가 빠질 차례다.


아들 덕분에 오랜만에 넷플릭스에서 인턴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일년반만에 직원 220명의 성공신화를 이룬 열정적인 30세 여성 CE0(앤 해서웨이), 수십 년 직장생활에서 익힌 노하우와 풍부한 인생 경험을 쌓은 70세의 홀아비(로버트 드 니로)가 그 여자 밑에서 인턴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배려와 넉덕함이 딱 우리 나이 노친네들 보기에 좋은 영화다. ‘늙은이들 무시마라! 우리들도 어딘가 쓸모가 있다.’고 외치고 싶은 나이에 우리들 자존감을 팍팍 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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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넘어 박원순 시장 실종!’이라는 뉴스특보가 뜬다. 안희정, 김경수, 이재명, 조국 등 진보진영의 잠룡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매장시켜온 기득권세력의 음모가 다시 작동하는 듯한 예감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든다. 


사회운동과 우이동지역 환경운동을 하면서 20년 넘게 박시장을 알고 좋아하는 우리 셋은 동시에 할 말을 잃고 즐거운 식사시간에도 말없이 조용히 밥만 먹었다. 몇 번 만나 얘기를 나눈 사이여서 그의 '유서', '미투 고발', '시신발견'의 뉴스가 차례로 뜨면서 참으로 암울한 저녁을 맞았다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27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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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그게 돈이건 여자건 명예건 궁지에 몰리면 도덕적인 잣대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하는 사람은 목숨을 내놓는다. 노대통령이 그랬고, 노회찬 의원이 그랬다. 최근에도 정의연에서 봉사하던 손영미씨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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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보수인사들은 철면피하게도 온갖 치욕을 당해도 자결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김학의 사건’을 지켜보며 국민이 의아해하듯이, 비디오가 나오고 피해자가 자살을 해도 쓰레기 언론과 개검이 잘도 감싸주고 잘도 넘어가지 않던가! 그런 인간들로 차고 넘치는 게 되레 정상이던 세상이었다. 성에 대한 우리 구세대의 의식구조가 새 세기에 더 민감하도록 적응을 못한 대가를 우리 모두가 고스란히 치르고 있다. 명예와 생명을 상실하고야 하나씩 배우게 된다는 게 속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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