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7일 화요일, 맑음


흰구름을 화관처럼 쓴 산이 방금이라도 걸어 내려올 듯한 월요일 오후다. 마을앞 윗논에는 사랑을 나누는 거북 한 쌍이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려 넘어가는 서산의 해를 보는 척한다. 동네 사람들은 풍요와 장수를 상징하는 저 장대한 거북바위가 올해도 풍년을 가져다 주려니 믿고서 금년에도 부지런히 모판을 실어다 논에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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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밤새 나락의 안부를 물으러 올라오는 구장은 애가 타 죽는다. 오늘이 소서인데도 방천난 논 두럭도 아직 손질 못하고, 논에 물도 가두지 못한 채 유영감은 아직도 벼심기가 늦지는 않았다고 마음을 놓고 있는 까닭이다. “다 틀려 부렀어. 맨날 나더러 너무 서둔다고 지청구를 하드만, 저 두 마지기는 내년이나 봐야겠구만.”


농사를 지어도 벼 한두 가마나 나올까말까 하는 땅뙤기지만 땅을 한 뺨이라도 늘리려는 욕심에 논두럭을 파내리다 둑을 무너뜨렸으니 본인은 그렇다쳐도 돈을 대는 아들에게 할 말이 없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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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마당의 독일가문비 나무가 훤칠하게 이발을 한 건 보기에는 좋은데, 생각할수록 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어제 인터넷 수리를 하러 온 KT 기사가 우리 인터넷 선이 끊어졌다면서 새로 선을 까느라 전주에 사다리를 기대놓고 오르내리면서도 시골처럼 땅이 고르지 못한 곳에 사다리를 세우는 건 목숨 거는 짓이에요.’라고 탄식하였는데...


산업안전공단에서 나온 법조항 근로조건에도 사다리를 쓸 적에는 꼭 21조로 안전대를 착용하고 작업을 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았다는데(이동식 사다리 안전작업 지침: 사다리 작업 높이가 2미터이상 3.5미터 이하인 경우, 2인 1조 작업 + 안전대 착용 + 최상부 및 그 하단 디딤대 작업금지. 사다리 최대길이가 3.5미터 초과한 경우 작업발판으로 사용금지), 내가 하루 집을 비운 사이 80 노인이 혼자서 5미터 넘게 연결한 사다리를 타고 작업을 하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하다니! 아마 그의 마음 한쪽엔 우리가 밤마다 하는 기도대로, ‘우리 부부 같은 날 같은 시각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갈 꺼다!’라는 믿음이 깊이 깔려 있는 듯하다. 부부가 수십년 같이 살다가 혼자만 남게 되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견딜까 서로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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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리산 종교연대의 대표직도 맡았던 조교무님의 정토(淨土; 아내를 이렇게 정결한 땅이라 부른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호칭인가!)께서 열반(涅槃)하셨다는 부고가 떴다. 종교연대와 환경운동에 늘 앞장 선 교무님이 아내의 간병으로 몇 해 전 중책들을 내려놓으셨다더니... 여자야 생명의 원천이라 끝까지 자기 앞가림을 하지만 남은 사람이 남자였을 적에 주변에서도 퍽으나 마음을 쓰게 된다


보스코처럼 짜리몽땅한 남자와 살려면 와이셔츠를 새로 사면 소매를 잘라야 하고, 요즘처럼 몸이 불어만 가면 바지 뒤를 터서 품을 늘여야 한다. 모처럼 재봉틀에 앉아 곤색바지에 검정색 천을 덧대면서 여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남자라는 게 얼마나 초라한 삶일지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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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동댁이 올라오다 보니 유영감님이 씻지도 않고 저녁도 안먹고 자기집 층계에 넋놓고 앉아 있더란다아내가 떠난 지 7저 사람은 여자 없이도 잘 지낸다고 소문날 정도로 깔끔한 사람인데역시 여인의 품안으로 잉태되어 왔으니 여인의 품에 안겨 마지막 눈을 감아야 하는 아름다운 숙명을 남자들은 기대할 게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 호랑이가 새끼치게 무성해진 텃밭에 들어서니 한 열흘 만에 내가 할 일이 산더미 같다. 나는 풀을 매고 보스코는 귀요미네 준다고 열심히 자두를 땄는데, 귀요미가 마다하자 많이 섭섭해한다. 그래서 ‘델꼬 들어온 딸주겠다고 따온, 특별히 알이 굵고 잘 익은 자두바구니는 진이네 차지가 됐다


지난번 배봉지를 싸다 미처 못 싼 배알이 벌거벗고서도 제법 커가는 모습에 미안했던지 100장도 넘게 배를 쌌다. 이렇게 아침 노동을 한 뒤에 받는 밥상은 더 고맙고 맛나다. 내 손으로 농사지은 식재료가 식탁 위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변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오후에는 요즘 많이 지쳐있는 체칠리아와 스.선생을 찾아갔다. ‘솔바우마당 입구에는 잔디를 심고 나머지에는 잘게 부순 돌을 까는데 산속의 삶은 너나나나 일에 찌들어 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런 일도 안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 체칠리아를 추썩여 휴천재에서 잘라간 부추로 김치를 담그고 양파김치를 담가주고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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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동댁이 저녁나절에 우리집 뒤에서 옥수수를 따고 있다. 우리집 자두를 나눠주었더니만 옥수수를 나눠준다. 당장 삶아서 보스코랑 햇옥수수를 하나씩 물고 아주 흡족하게 책을 본다. 창밖의 무논에 개구리는 떼창을 이어가고, 새끼 네 마리를 키우느라 어미 고양이는 갈비대가 앙상하도록 말라만 간다. 저 개구리들 뒷다리에 살이 오를 즈음에야 저 어미 고양이도 허기에서 해방되리라. 기울어가는 달빛에 박꽃과 달맞이꽃(제주에서 캐다 심은)이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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