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30일 화요일, 오락가락 여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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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 비오기 전 선선한 날씨에 이렇게 눈을 떴는데 무슨 일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완전무장을 하고 낫을 들고 나섰다. 블루베리 농사로 일년 중 제일 바쁜 진이엄마도 잠을 깨어 창밖을 내다보던(= 날씨를 살피던) 중이어서 내게 한 마디, “농사꾼보다 더 일찍 일어나네요.” 그 말인즉 내가 농사꾼이 아직 아니라는 얘기. '귀농'과 '귀촌'은 엄연히 다르니까 맞긴 맞는 말이다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내 텃밭 일보다 이웃 기욱이네 고사리밭에서 개망초를 뽑으려는 참이니까.


그 동안 기동씨네가 부쳐오던 밭(원래 논이다)이 기욱이네로 넘어간 뒤(기욱이네 큰집 소유인듯) 그 땅엔 대나무가 사방에서 솟아오르고 어디서 날아온 줄 모르는 옻나무와 뽕나무가 두서없이 자라올라 새벽녘 인력시장 처럼 웅성거린다. 거기다 저렇게 하얗게 피어오른 개망초 꽃씨를 그대로 두면 내년쯤엔 개망초 꽃밭으로 버려질 일만 남는다. 더구나 그 밭과 나란한 우리 텃밭도 그 풀씨로부터 안전하지 못해 오지랖 넓고 극성스런 이 여자가 나서는 중이다. 낫으로 뿌리까지 찍어 몽땅 뽑았다


밭둘레로 잡초가 우거졌던 우리 텃밭은 신선초가 천하를 평정하고 잡초들이 번지지 못하게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지만 아직 그 세력이 미치지 못한 배나무밭 바깥축대 근방엔 덩굴식물들의 횡포가 국경을 넘보는 오랑캐들 처럼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그곳에도 내가 토벌에 나섰다. 배밭은 본래 보스코 몫이니까 그가 예초기를 돌려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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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부터 얼마나 낫을 휘둘렀던지 머리는 산발이요 깔따구에 물린 두 귀는 후끈후끈. 우리 딸들이 알면 '제발 일 좀 그만하시라요!'라는 지청구가 이만저만 아닐 텐데.... 쑥을 베어내면서 보니까 박하가 잡초 사이사이를 더듬어 오고 있어 머지않아 민트밭이 될 조짐이다. 요즘 민트만 보면 베어다 말려서 차를 만드는데 필이 꽂혀 언젠가 귀요미네를 흉내내서 민트차 제조공장 사장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밭 축대 밑과 구장네 감자밭이 만나는 귀퉁이에 구장댁이 어디선가 얻어다 심었다는 이상한 식물이 있다. 지난봄 1미터 가까운, 거무튀튀한 보라색 흉물이 세 포기 꽃이랍시고 돋아났다 스러지더니 여름이 오자 줄기와 이파리가 그만큼 흉물스럽게 돋아난다. ‘삶아 먹으면 몸에 좋다해서 얻어왔노고 한다. 외래종 천남성 같은데 여수 양교수님에게 문의해보니 '악마의 혀`라 불리는 식물에 가까워 보인단다. 꽃도 줄기도 이파리도 전혀 호감이 안 가는데 네 정체는 도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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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수술을 길게 내미는 '꽃'이 피고 여름이 되자 대궁과 잎이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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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겨울. 우리 마을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휴천강에서 그물질해온 피레미를 회쳐서 양푼에다 버무려 함께 먹더니만 단체로 간디스토마가 걸려 단체로 구충제를 먹고서 함양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나서 우세를 산 일이 있다. ‘전국 최고의 간디스토마 마을!’이라는 신문기사야 다른 동네에서도 그런 일 없도록 계몽을 하려는 의도로 냈겠지만 문정 산다하면 '! 간디스토마!'라는 놀림을 한참 받았다. 만약 저 식물이 외래종 천남성 독초라면 그 뿌리를 단체로 삶아 먹고 이번엔 문정리 사람들 악마의 혀’ 넘어로 단체로 입장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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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땀으로 목욕을 하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가뿐한 몸, 맑은 맘으로 장마에 든 지리산의 저 아름다운 구름의 묘기를 바라보며 틈틈이 책을 읽고 아침저녁 보스코랑 시간기도를 바치는 휴천재 나날은 이렇게 행복하다. 보스코 역시 어제 오늘 휴천재 뒤꼍에 봄새 죽순이 자라오른 오죽밭을 낫으로 정리하고, 휴천재 마당에 해마다 세를 넓혀가는 질경이를 괭이로 캐내고 나머지 시간엔 아우구스티누스와 여전히 씨름을 하는 한가한 세월. 그러는 새 오늘이 6월 말일이니 2020년도 딱 절반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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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씨가 코로나로 산속에서 꼼짝 안 하다 '지루한 시간에 볼 재미있는 책'을 좀 빌려달라고 스.선생과 함께 내려왔다. 재미라면 코엘료 만한 작가가 없어 그 책을 챙겨주고 이탈리아의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4부작을 주문해줬다.


15년쯤 전에는 이 근방에 내려와 새로 자리잡는 '귀촌인'들이 문정공소에 같이 나오는 인연으로 '지리산멧돼지'라는 거창한 이름을 짓고  많이도 몰려다니고 산행도 했었다. 그러다 각기 정착이 이뤄지고 살림과 생업에 분주해지면서  가까이 오가는 일이 줄고 우리마저 어느듯 스스럼 없이 오가는 사이가 도정 스.선생 부부와 아래 소담정 도미니카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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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선 부부간에도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드문 '독립채산제.' 우리가 오늘 만난 집은 젊어서부터 부부가 맞벌이를 한 터라 퇴직한지 오랜 지금도 아내는 먹는 것을 책임지고, 남편은 주거를 챙기는 가계운영을 한단다. 그런 가정에서는 밥상에서도 우리 귀에 좀 선 대화가 웃음을 자아내곤 한다'우리집엔 왜 이런거 하나도 없노?'돈도 안 내고 (내가 한) 밥 먹으면서 뭔 말이 그리 많노?' '당신은 (내가 지은 집에서) 공짜로 살고 있잖아?' '에고그것도 집이라고.' '비바람 피하면 되는 거제 뭐가 어때서?' '... ...'


나처럼 돈 한 번 벌어 본 적 없는 여자라야 남편의 모든 수입을 혼자 챙기고(보스코 지갑에 용돈 챙겨넣는 일까지 포함), 남편한테도 큰소리 땅땅 치고, 하루종일 바가지를 긁으며 살 수 있나보다. 부부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는 묘한 역학관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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