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23일 화요일, 맑음


알프스에 사는 마리오는 여름이 다 지나가는 9월초에 텃밭에서 아직도 잎이 파란 감자와 양파를 필요할 때마다 캐다주곤 했다. 휴천재 텃밭의 감자도 어제가 하지였는데도 아직 잎은 파랗고 흙속엔 살구알 만한 감자만 가득하다. '나도 저걸 밭에 놔둔 채로 그때그때 캐다먹을까?' 하며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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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답답했던지 드물댁이 큰비 지기 전에 빨리 캐야 한다고 성화다. 동네 아짐들도 양파와 감자는 비오기 전에 캐야지 비오고 나면 싹 썩는다며 부산스럽다그냥 쳐다만보고 있다가 '그래도 명색이 하지감자니까 잎이 시든 것부터 캐보자'고 어제 오후 늦게 일을 시작했다


캐면서 보니 예상 외로 수확이 형편없다. 한창 알이 들 봄에 가뭄이 심했던 탓이란다. 어쩌다 큼직한 알은 썩었고 삶아먹기보다 졸여먹어야 할 잔챙이는 주눅 들어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고아원 애들 같다. 일년 먹을 농사치고는 수확이 형편없어 전년과 비해 봐도 절반밖에 안된다. 그래도 우리 먹을것은 나왔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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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성무일도 끝에 묵상 삼아 양승국 신부님이 페북에 올리는 글을 읽곤 하는데 오늘치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바로 공동체생활이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일이다. 또한 이 공동체에 뼈를 묻을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다. 갈수록 공동생활이 힘들어지고 형제들과 직면하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한 걸음씩 성화의 길로 나가려는 몸부림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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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진솔한 고백인가!’ 수긍하면서도 누구라도 한 30년 살다보면 익숙해지고, 고속도로 달리듯 수월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때마침 빵고 신부가 전화를 했다. ‘오늘 읽은 양신부님 생각을 너는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자기도 양신부님 말씀에 100% 동의한단다. ‘엄만 아빠랑 살며 한 50년쯤 되니까 익숙해지던데?’하고 물으니, ‘그건 먼저 아빠가 착해서고, 엄만 남편 하나와 사는 거지만 갖가지 성격의 남편 스무 명쯤과 함께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답이 나올 꺼에요란다. 그 말엔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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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주변에 자라는 서너 그루 매실은 약을 안 해서 대부분 지루익어 떨어지고 마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매실이 실하게 익고 있다. 보스코가 아깝다 고 오늘 아침 대나무 장대로 털어놓았다. 오후엔 성삼의 딸들 수도회수녀님들이 피클 담글 신선초를 베러 온다고 해서 바쁜 터에 앞뒤를 생각 않는 보스코가 매실을 우선 털어놓고 보니 나는 엄청 부지런해져야 했다


아무튼 남자가 먼저 저지르면 여자는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한다는 믿음, 소위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신념을 보스코마저 그동안 50여년의 삶에서 터득했나 보다그러고 보니 저 남자사람도 내게는 가끔 '좁은 문'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신뢰를 저버릴 수가 없어 남편이 털어놓고 들어간 매실을 아내가 주워 담으니 12Kg! 우선 깨끗이 씻어 황설탕 11Kg에 버물어 독에 담았다. 살이 깊고 싱싱하니 얼마 뒤면 마시거나 김치 담글 때 쓸 매실이 생겼으니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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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시 쯤 수녀님 네 분이 와서 정자에 간식상을 차렸다. 보스코에게는 휴천재 숙원사업이 하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사들고 온 데루타(Deruta) 돌식탁이 있는데 십수년 넘게 마당에 놓여 쓰임새가 없었다. 그것을 정자에 올려놓고 사람이 둘러앉아 식탁으로 쓰는 일이 그의 소원이었는데 지난 토요일 놀러온 은빛나래단남정들 네 사람의 손을 빌려 드디어 휴천재 정자에 올려놓는데 성공하였고, 오늘 첫마수로 그 식탁에 수녀님들 간식상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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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을 들고나서 완전 전투태세로 차려입고 수녀님들이 텃밭에서 신선초를 낫으로 베어 자루와 박스에 담아 옮겼다. 새로 시작하는 수도원의 초창기 수녀님들은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거치며 결속된 공동체 힘으로 이겨나간다. 코로나 사태로 성당에 미사가 없고 생산물을 팔 판로가 없어 수입이 끊기자 이 수녀님들은 누가 가져다 준 쌀과 산나물 들나물을 뜯어다, 그러니까 초근목피로 그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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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덕분에 산과들에 나는 온갖 풀들을 다 맛볼 수 있었어요.”라는 막내수녀님의 한마디는 섭리에 의존하는 삶을 고스란히 들려주고 남는다. 어제 거둔 감자 중 한두상자만 남기고, 소담정이 오늘 감자를 거두면서 내놓은 한 상자를 모두 드렸더니 저녁마다 감자를 삶아 먹는데, 오늘 저녁에는 썩은 감자부터 삶아 먹겠단다. 자칫하면 고흐의 눈물겨운' 작품 "감자먹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밥상이 되겠다. 


베어놓은 신선초를 박스와 자루에 담아 봉고차에 싣는 데도 얼마나 요령있게 싣는지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겠다. 오전에도 어디 가서 매실 200Kg을 따다 놓고, 오후엔 한 시간 반을 달려와 지리산의 신선초를 베어가는 저 힘든 고생을 마다하지 않다니! 수도자는 일 자체가 기도요 찬양일 때 거기서 나오는 기쁨으로 수도생활도 영글어가나 보다. 저녁이 다 되어 운봉에 함께 가서 냉면을 먹고 헤어졌다.


고흐는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많이 그렸다. 감자밖에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저녁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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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온도가 32도였는데 저녁이 되니 22도! 지리산 산골의 서늘한 저녁날씨가 오늘 하루의 피곤을 풀어주고 남는다. 내일부터 장마에 든다는데 양파와 마늘, 감자를 다 거두었으니 오늘밤은 발뻗고 편히 잠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