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21일 일요일, 맑음


문섐이 그동안 집필하던 책을 마무리하고 딸과 아들도 함께 임실 할아버지댁으로 내려온다는 소식.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김원장님댁 가족을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자리여서 호기심이 동한다


김원장님과 부모님은 한두 번 휴천재를 방문하셔서 만났고 원장님네 부부와 아들딸은 서울에서 여러차례 함께 만났지만 3대에 이르는 가족 속에서 함께하는 모습을 보는 건 퍽 흥미롭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녀딸이 가져다 가르쳐드린 게임을 하느라 저녁마다 TV시청도 마다하시고  게임하는 재미로 행복하게 보내신다는 얘기도 얼핏 들은 터.


어제 토요일 12시가 다 되어 임실에 도착하니 원장님댁  모든 문은 열린 채인데 인기척이 없고, 우편함에는 새가 알을 까서 키우고 있으니 우편물은 창문 안으로 넣어주시오!”라는 이색적인 안내문만 적혀 있었다. 우체통 안에는 5년째 해마다 딱새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고서 떠나 간단다. 우체통을 살짝 열어보니 과연 새끼 네 마리가 꽤 큰 몸집을 하고서 엄마 아빠가 물어오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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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알을 까서 키우고 있으니 우편물은 창문 안으로 넣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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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집 아들이 땀에 흠뻑 젖어 맨먼저 들어오는데 밭에서 모래를 날라 파밭에 채우다 오는 길이란다. ‘아빠는 밭에서 파를 심고서 마무리를 하시는 중이고, ‘엄마는 산에서 사방 1미터 안에 있는 잡초를 두 시간째 집중적으로 초토화시키시는 중이고, ‘누나는 좋아하는 강아지한테 산보를 시키는 중이고, ‘할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손녀를 따라가신 중이고, ‘할머니는 집앞 화단에서 좋아하시는 꽃을 돌보시는 중이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말하자면 식구들이 각기 '좋아하는 일'을 제각기 자유롭게 하는 삶이 그 집안의 고유한 풍경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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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집 아들이 내게 묻는 말. “엄마와는 통신이 안 돼서 모르겠지만 혹시 엄마와 협의를 하고 오셨어요?” '협의'니 통신이라는 어휘가 일상으로는 생소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엄만 곧 오실 거에요.”라는 평범한 일상어로 대체하여 나를 안심시켰다. 집집이 언사나 어투가 다르고 가족 사이에 독특한 색채가 있지만 아마도 이 집은 모두 자유인이어서 상대방의 권리를 최대한 존중함과 동시에 자신의 자리 역시 확실하게 지키는 풍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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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이 다 모이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어머님은 내게 튼실한 마늘 한 접을 선사하셨다) 김원장님네 널따란 농장도 둘러보고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서 집으로 돌아와 다과를 나누며 모두 재담가들인 그 가족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 마을이 하필 임실치즈 마을이어서 심지어 냇물 위로 난 다리 이름까지 치즈교였다. 집에 와서도 그들과 나눈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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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지천으로 자란 박하를 베어다 씻어 널었다. 박하차는 누구나 반기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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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으로, 운봉으로 돌아오는 길은 일부러 지방도로를 탔다. 벚꽃이나 이팝나무 가 화려하던 마을길은 온통 짙은 녹음의 청년으로 변했고 모심기가 끝난지 한참인 논들은 개구리밥까지 가득한 푸르른 잔디밭이 되어 바람이 불 적마다 초록 물결이 인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름은 코로나 공포도 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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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찾아오는 황새가 올해도 휴천재 옆산에 돌아왔다. 일년만의 상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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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장님댁 두 의사선생께 이 코로나의 종식이 언제나 가능할까?’ 물어보니 코로나 균은 너무 변화무쌍한 RNA 생명체여서 종식은 불가능하니까 해마다 독감예방 주사 맞듯 그렇게 대해야 할 꺼다.’라는 답변. 그렇다면 코로나를 피하거나 공포로 대할 게 아니고, 친구 삼아 그냥 옆에 두고 사는 길밖에 도리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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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멈춘 공소 미사가 4개월 만에 재개되어 저녁 7시 반에 처음 있었다. 입구에서 공소회장 부인 막달이 체온을 재고,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성가는 라디오 녹음을  듣기만 했다. 우리 둘이 맡은 독서는 자리에서 그냥 읽고. 매일 동네에서 만나 아무 일 없이 지내던 사람들이 마치 코로나로 역할극을 하는 것 같았다. 미사 끝나고 간식도 없이 간단한 인사로 헤어져가는 신자들을 보며 허전하고 쓸쓸했다. 신부님도 많이 피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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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다쳐 입원했다는 유영감님(어떻게 다리를 다쳤냐는 얘기도 들려주는 아줌마에 따라 버전이 다르다)이 병원에서 주는 밥에 너무 배가 고파 떼를 써서 빨리 퇴원하고 마을로 돌아왔다는데(퇴원 사연도 여러 버전) 아마 철을 놓친 농사 걱정 때문이었으리라. 망종은 벌써 지나고 하지가 오늘인데 농부가 자기 논을 저렇게 버려두고 병실에서 잠이 왔겠는가! 어제도 힘이 다 빠져나간 허수아비 같은 몸으로 논두렁을 수리하는데 딱해서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두 아들이 대처에서 돌아와 아침나절 기계로 논을 갈고 오후에는 3부자가 함께 논을 치고 써래질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그 분이 해마다 내세운 모심기 마지노선 하지(夏至)가 오늘인데 벼는 아마 내일 심으려나 보다. 옛날엔 다 하지 께에 모심고도 잘만 가을걷이를 해서 먹었서!”하시는 낙천주의자가 유노인이기도 하다.


'8년 만에 온다는 일식(日蝕)'이라 들은 터라 오후 다섯시에 마당에 나가 선글라스 세 개를 겹쳐 구름이 살짝 해를 가릴 때 하늘을 보았다. 달님이 야무지게 해님 옆구리를 파고 들어간 광경이랄까 해님이 달님을 야무지게 한입 깨물었달까 아무튼 하나가 하나를 품은 광경이 선명하다. 보스코는 달님에 가려진 해를 카메라로 찍는다고 구름이 지나며 그늘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느라 얼굴이 땡볕에 빨갛게 익었다. 소년 같은 저 호기심과 정열을 누가 말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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