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23일 목요일, 맑음


하루 종일 엄마 생각이 난다. 내가 빵기, 빵고를 낳았을 적에 걔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하던지 하늘의 수많은 별이 한꺼번에 내 품에 떨어져 안겼다 해도 이렇게 뿌듯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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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기가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백지상태의 엄마는 아기와 단 둘이서 전혀 다른 세계에 적응하느라 무지 힘들었다. 산후조리는커녕 수발해 주는 사람도 없이 살림하랴, 애 돌보랴 실수난발에 엉뚱한 짓도 많이 했지만, 물만 줘도 하느님이 키워주시는 휴천재 텃밭의 푸성귀처럼 두 아들은 잘만 커줬다. 정말 엉터리인 아내를 세상에서 최고의 아내로 믿어준 남편(세상의 모든 엄마노릇, 아내 노릇도 난생처음이지만)! 보스코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어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나날에 이제는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그런데, 나를 낳아주신 엄마는 이제 어린애가 되어 침대에 누워 갓난아기처럼 기저귀에 실례를 한다. '우리 아긴 똥도 예뻐!' 찬탄하던 그 새댁은 삶을 살아내는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저 유무상통에서 엄마 주변의 무표정한 얼굴들은 '그냥 남은 날들을 치워가는 중'이고 보살피는 사람도 본인도 '그냥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표정들 같아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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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만난 그 남자는 '죄스럽게 자기 엄마 얘기를 꺼냈다. "12월이면 명퇴를 하는데 나이 60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30, 40년을 어떻게 살아낼까 암담해요. 어머니는 아이를 열둘이나 낳으셨고 딱 반타작을 해서 여섯은 죽고 여섯이 남았는데 그중 제가 제일 큰아들이어서 집에 모시고 있어요. 구순 중반을 넘은 부모님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가 병원 가서 두세 달 입원하여 링거와 약으로 다시 살아나 집으로 오시길 몇 년이랍니다. 두 분이 이러기를 번갈아 하시니 이젠 제가, 제 아내가 죽을 것 같아요. 아이들 결혼도 아직 끝이 안 났고... 경제적인 문제에다 삶의 질을 따지는 건 아예 사치더라구요."


엄마는 오늘도 침대에서 변함없는 나날을 맞고 게실 텐데 어린 날 내게 해주셨던 그 정성스런 보살핌을 나는 얼마나 갚았는지... 생각만으로도 죄스럽다. 더구나 오늘이 내 생일이다. 엄마는 진달래 피고 온갖 새가 우는 이 계절에 내게 세상을 안겨주셨는데, 이런 사월에 나는 엄마의 가슴에 배반의 비수를 꽂았다.


19734! 내가 '그린게이블'이라고 부르던 집, 그야말로 엄마의 자궁을 탈출하여 전혀 예견되지 않던 황무지로 떠났다. 그때 엄마가 겪으셨을 고통과 탄식, 눈물은 내겐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진정 행복할 때 엄마도 행복하시리라'는 자기 최면을 걸고 뒤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먼 길을 떠나왔다. 훗날 '너를 사랑하던 만큼 죽도록 미워했단다' 하시던 엄마. 그 딸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모든 걸 잊고서 보스코더러 "우리 딸에게 잘해줘 고맙네" 라시며 평생 누구에게도 안 해보셨을 고백을 하시던 엄마! "성서방, 사랑해!" 


"엄마!" 대답이 없다. 해답도 없다. 엄마라는 우주는 지금도 무한대로 팽창해 나가고 있다.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38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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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기가 제네바에서 동영상으로 보낸 시아시우의 '하무이 생일 축하'(어느새 '할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로 바뀌었다)노래로 아침을 연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스런 두 손주들. 엄마에게 진 빚을 나는 걔들에게 갚아가고 있는 것일까? 빵고신부는 오늘 아침 공동체 미사에서 '맘마말가리타를 위해'라는 지향을 올렸더니 "그분이 누구냐?"고 묻더란다. "울 엄마!"라고 대답했다는데, 이젠 내가 엄마가 되어 쟤들의 보살핌을 받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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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셋째 딸귀요미가 오늘이 칠순을 맞는 내 생일이라고, 모레 임마르코 신부님 영명축일을 함께 축하하기로,  함양읍 샤브향에서 점심 모임을 주선했다. 미루가 가까이 있어 서울의 딸들은 한 짐 덜었다고들 한다. 그미가 은빛나래단이라고 이름붙인 우리 여덟이 만나면 언제나 웃음 만발이다. 남해 형부네, 산청 임신부님 오누이, 그리고 우리 부부, 이렇게 여섯이야 무엇을 해도 시간이 넉넉한, 황혼의 붉은 빛이 마지막 꼬리를 감추는 하얀 강변의 물결위에’은빛의 여유로운 시니어지만 할 일이 산더미 같은 미루네 부부에게는 고마우면서도 늘 미안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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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향에서 식사를 마치고 콩꼬물에서 커피와 후식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늘 해도 고갈되지 않는 샘물같이 시원하고 달콤한 이야기에 웃을 수 있음은 모두가 욕심이 없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는 신앙을 공유해서다. 시국관이 같아서 이번 총선 결과를 놓고서도 다 함께 기뻐하는 사회적 공감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콩꼬물옆 좌석에 연수씨와 병곡의 안나마리아도 반가웠다.

집에 돌아와 페이스톡으로 제네바 아범네 가족을 다시 보고, 오늘의 마무리 축하공연으로 '큰딸네 손녀 윤서'의 재롱을 보고나니 정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복많은 행복한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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