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5일 수요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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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일이다. 다섯 시에 눈이 떠지자 더는 잠이 안 온다. 확실히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고 특히 이 점에 있어 내가 좀 민감하다.


이런 때 제일 바람직한 일은 하기 싫던 일로 꼭 해야만 할 일을 하는 게 좋다. 그래서 아래 식당채 부엌에 있는 냉장고 냉동실을 정리하기로 했다. 대부분 여자들이 대책 없이 사온 물건이나 먹다 남아 버리기 아까운 음식을 마구 쟁여 넣다 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언제 넣었는지도 모르는, 유통기간도 없는 검은 봉지 속에서 영구 숙면을 하는 음식들이 쌓여만 간다. 그러다 냉동실 문만 열면 우수수 쏟아져 나오곤 하는데, 보다 못한 남편이 행여 말 한 마디 잘못하여 내무장관의 자존심과 심기를 건들었다간 좋던 부부관계마저 쫑날 수도 있으니, 생각 있는 남편이라면 절대 안 해야 할 행동이 냉장고 열어보고 잔소리하는 짓이란다.


여덟시도 지나고 아홉시가 다 되어도 아침밥 기별이 없자 보스코가 아래층으로 내려와 부엌바닥이 음식 봉다리로 홍수난 걸 보고는 얼른 사라진다. 나는 먹을것과 버릴 것, 놓아둘 것, 그리고 고양이나 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구분하여 정리했다. 30%는 버려야했고 10%는 짐승 먹이. 냉동실을 싹 청소하고는 고기, 생선, 채소, 유제품으로, 칸마다 소장된 음식의 이름을 써 붙였다. 이 정리의 기쁨이 얼마나 갈지는 내 노력여하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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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 민주당이 크게 이기고 냉동실 정리도 했으니 오늘은 기쁜 날이다. 앞으로 4년 후 선거 때나 냉장고 정리를 다시 하려면 자중해야겠다.


어제 방앗간에서 떡을 해오다가 방곡 사는 이교수네 들러 나눠주고 동네에서도 몇 집 주고 나니 남은 떡이 얼마 안 된다. 쑥의 계절인지라 동네사람들은 대부분 한 차례씩 떡을 해 먹은 후여서 진이네, 드물댁과 가밀라 아줌마에게만 갖다줬다. 임실댁과 거믄굴댁한테도 갖다주고 싶었지만 그 길에는 가동댁 앞을 지나야 하고 동네 스피커인 그 아줌마한테서 무슨 소리가 돌까 싶어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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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댁한테 그 말을 했더니만 "임실댁은 우리 집에 와서 묵었다 아이가?" 라며 한 마디 보탠다. "내사 그렇게나 쑥을 뜯어 줬는데도 떡을 해서 나한테는 씨알만(새알만큼만?) 주고 자기 자석들한테 싹 보내 뿌렀어." 그러니까 내가 그 댁에 안 줘도 괜찮다는 얘기다. "가동댁도 까밀라 집에서 묵고 가드만." 한 마디 덧붙여 날 안심시킨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본 사람도 (자기 사정에는 무척 주관적이어도) 남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에는 시비를 가리고 무엇이 공정한지 안다는 사실이 놀랍다. 드물댁이 오늘도 나한테 쑥을 뜯어다 주겠다더니 "선거하느라 몬 뜯었다." 글도 모르고 숫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투표를 했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되고 싶단 사람들 몽땅 찍어줬제!"라는 명답. 영남사람들 지도를 온통 핑크색으로 물들일만큼 몰표를 주었으니 드물댁 차라리 글자를 모르는 편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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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감네 논 두럭에서 쑥을 뜯고 있으려니까 '오늘은 무슨 명목으로 또 뜯느냐?'는 보스코의 물음. '어제 쑥떡이 거의 다 떨어져 쑥떡 한 되만 더 하려고.'  '그리고 이교수네에 있다는 호박고지에 우리 곶감 좀 보태서 시루떡을 해다 주려고.' 라는 내 대답에 나를 멀거니 보더니만 '그동안은 나물 뜯는데 필이 꽂히더니, 이젠 떡방아에 필이 꽂혔나봐' 라며 나를 놀린다. '오늘자로 나물뜯기도 떡방아도 끝낼 테요.'라니까 '과연?'이라며 안 믿긴단다. 한 사람과 50년쯤 살면 본인보다 상대가 나를 더 잘 안다.


화계 방앗간에 떡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강변에 흐드러진 쑥이 어찌나 고아 보이던지 차를 멈추고 쑥을 또 뜯었다. '그냥 쑥국이나 좀 끓여 먹으려고.' '정말, 마지막으로.' 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투전꾼이 노름을 않겠다고 손가락을 자르더니, 발가락으로 화투를 잡더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6시 출구조사에서 민주당의 승리와 과반수 확보를 듣고서 감사의 로사리오를 바쳤다. 지난 한 달 저녁마다 '제발 문대통령 안정적으로 국정운영하게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주십시오.'기도해왔는데... 감사합니다. 180석이 내다보이고 자정도 넘었으니 맘 놓고 푹 자야겠다, 오늘 같이 좋은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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