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9일 목요일 맑음


춘분 지나고 달포가 넘으니 해가 산청 왕산 끝자락에서 떠오른다. 작년 초겨울. 개울에 떨어진 가랑잎에 엷은 성애가 끼기 시작할 무렵, 텃밭은 온통 무와 배추가 차지하고, 빈 자리엔 세상 무서울 게 없이 세력을 넓혀가던 신선초에 무서운 괭이질이 시작됐고 신선초가 사라진 자리엔 시금치와 상추, 겨울채가 움을 틔웠다. 겨울채(유채)는 꽃 피우라고 놓아두고, 상추는 아기 적부터 지금까지 점심상 효자노릇을 단단히 한다. 1000원짜리 씨앗 세 봉지가 흙을 만나 싹을 틔우고 하느님의 눈길을 받아 신나게 자라는 모습에 내가 할 일이라곤 감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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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봄날이 가면서 시금치는 어느 새 비루먹은 것처럼 누렇게 시들어간다. 나더러 심으라고 베고니아 꽃 모종을 들고 온 도메니카가 "시금치는 철지났으니 싹 뽑아서 버려라" 했지만 '그래도 내가 심은 건데...' 하며 손톱만한 것까지 뽑고 다듬고 삶아서(아린 맛 좀 빠지라고 물에 담가 놓았다) 올리브유에 치즈를 뿌리고 볶아 이탈리아 요리로 점심상에 내놓았다. 철지나고 못난 푸성귀도 거두고 다듬어 먹어주는 편이 좋을까? 뿌리 채 뽑아던져 말라 죽게 하는 편이 나을까시금치에게 물어야겠지만 푸성귀는 말을 할 줄 모르니...


아무튼 오늘은 성목요일, 사랑의 애찬을 나누는 날이라 점심상에 찬보새기가 푸짐했다. 텃밭과 이웃 논두럭 밭두럭에서 뜯은 나물들이며, 흐르는 개울이 외롭게 키워낸 돌미나리지만 흙에서 봄기운을 받고 보약으로 자라 오르는 생명들이다. 도메니카가 접시를 하나하나 꼽는데 신선초, 참나물, 민들레, 브로콜리(여기 아짐들은 보리꼬리), 미나리, 시금치, 머위, 봄동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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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서 사는 미자씨가 실하게 자란 블루베리 한 그루를 선물로 준 적 있다. 산성 토양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니 소나무 밑에 하얗게 거미줄 끼고 검게 썩은 흙을 긁어다 깔고서 심으라고 했다. 어제 오후 밀차를 끌고 자루를 들고 휴천강변 숲길로 솔잎흙을 뜨러 떠났다. 바람은 살랑이고, 크고 작은 새들이 짝을 만나 신혼집을 마련하느라 나뭇가지마다 쌍쌍이 궁리들을 하고 있다. 보스코와 나 늙은 인간 한 쌍도 흙을 긁어모으고 퍼담으며 새들도 부러워할 만큼 재미나게 놀았다할미꽃 모종도 캐고, 흰색 제비꽃도 떠왔다.


개울가 양지바른 바위에서 싸간 간식을 하는데외딴집 아짐이 내다본다. 하루 종일, 아니 남편이 일 나가면 몇날 며칠이고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외진 곳이니 사람 소리에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리라. 10년전에 그 집 집들이 할 때 본 얼굴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커피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사람이 귀한 곳이라 사람대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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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구석에다 블루베리를 심고, 시금치가 떠난 자리에는 루콜라(남해 사는 모니카 언니가 각별히 좋아하는 채소)를 씨뿌렸다 땅에 터득이고 앉아 호미질하고 풀을 뽑거나 씨를 뿌리다 보면, 언제 날아왔는지 머리결에 모래가 한주먹 서깨를 튼다. 손가락으로 빗질을 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밭일을 하고 들어오면 식탁, 의자, 베게, 심지어 시트에서까지 모래 알갱이가 짚힌다.


오늘 오후도 꽃밭에 베고니아를 심고 있는데 드물댁이 뒷짐을 지고 나타나 "심심헌데 쑥 우리 뜯으러 갑셔. 내일 쑥꾹 끼래먹게좋은 데 봐났지롱." 책도 읽어야 하고 대리미질도 해야 하지만 하와의 딸들은 DNA 속에 타고난 채집본능을 못 이기는지라 "에이, 그럽시다. 일 다 하고 죽은 사람은 없다니까." , 민들레, 참나물, 돌나물이 가득 한 소쿠리를 이층 데크에서 내려다 보는 보스코. "이번엔 누구 차례야?" "내 친구 한목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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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성주간의 성삼일(聖三日)인데 성무일도로만 넘기기 뭣해서 평화방송에서 중계해 주는 대로 미사를 봤다.’ 신자들 없는 미사는 참 쓸쓸하지만 이번 코로나 경험으로 미루어 TV에서 미사 보고문자로 성사 보고’, 핸폰 결제로 헌금하고’... 그런 세상이 머지 않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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