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두레 1994.7.24: 빈무덤: 우리들의 가정 이야기]

 

해방되어야 할 세 남자

 

전순란 (우리밀 살리기운동본부 공동대표)

 

아버지는 빈손으로 장에 가신다

어머니는 한 보따리 이고 가신다

돌아올 때 아버지는 술만 먹고 오시고

어머니는 한 보따리 이고 오신다

엄마가 “재희야, 이것 먹어라!” 하시면

아버지는 엄마한테 욕만 하신다.

그래도 남자들은 지만 잘났다고

지만 잘났다고 지랄하신다.

 

     우리 동네 우이동 문우회 시모임에서 이상범 시인(「고요시법」 1983년)이 암기하여 인용해 준 동시 한 편이다. 십수년전 충청도 산골 추풍령 초등학교에서 "장날"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백일장의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작품이란다.

 

세월이 흘렀으니 저 소녀가 지금은 엄마가 되었을 것이고, 뼈저린 경험을 거울 삼아 자기 아들쯤은 달리 키우고 있으리라. 여성인 어머니가 이기적으로 잘 못 키운 아들이 여성인 아내를 고달프게 만드는 “여성학적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우리집 아이들은 둘다 사내지만 집에서 밥을 곧잘 하고 설거지를 하며, 방을 치우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서 널고 걷어 정돈하는 일에 제법 익숙해 있다. 내가 여성해방을 논할라치면 “우리 집에는 해방되어야 할 남자가 세 명 있을 뿐이에요!”라고 투정까지 한다.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 남자들도 많이 바뀌었고 여자들도 어지간히 해방되었다고 자처하겠는데...

 

며칠 전 우리 집에 놀러 온 미국 교민 2세 처녀 이야기는 그게 아니었다. 이 처녀가 자기처럼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교민 2세 청년을 만나 사귀게 되었는데 그 청년이 하는 말이 지극히 “한국적”이었단다.

 

“나의 아내는 미국에서 일류대학을 나온 여자여야 한다. 그래야 머리 좋은 자식을 낳을 테니까. 그러나 여자는 일단 결혼하면 집안에 들어 앉아 살림하고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이들 키워야 한다!”

 

처녀의 말을 듣고 “그래도 남자라고 지랄하신다.”는 저 유전인자가 바뀌기에는 아직도 기나긴 세월이 흘러야 하나 보다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