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18일 화요일


그젯밤 빗방울이 어제 아침엔 눈발이 되어 부산하게 앞산을 오갔다. 저러다 내일 아침에는 스스로 지쳐 인수봉 턱밑에 걸터앉겠지. 요망한 것들의 발걸음에도 눈길 한번 안주고 무심하게 산자락을 내려다보는 인수봉은 40년 넘어서도, 아니 앞으로 천년 세월에도 저러려니....


[크기변환]20200217_171551.jpg


[크기변환]IMG_3917.JPG


[크기변환]IMG_3966.JPG


산동네 비탈길 성당 가는 길은 언데다 살짝 눈가루까지 뿌려 놓아 말 그대로 살얼음판이다. 행여 보스코가 넘어질까 넘어져도 함께라면 덜 아플까 싶어 그의 손을 잡는다. 그의 손은 늘 따뜻하다. 손끝에서 가슴까지 전해오는 온기가 눈가에서 웃음으로 피어난다. 긴 시간을 함께한 동무의 손을 잡으면 삭풍부는 가파른 언덕길도 듬직한 발걸음에 단단한 평지가 된다.


9어린이미사’. 까르르 웃음소리와 수선스러움이 삶의 생기를 더해 주고 미사에 살아있는 젖줄이 된다. 요즘 성당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창세기를 읽히나 보다. 신부님의 질문에 초딩 상급반이나 중딩들은 멍 때리는 표정이고, 아직 꽃밭에서 벌과 나비를 알아보는 초딩 하급반 아이들만 신부님의 질문에 신나게 반응한다. (저 애들마저 커버리면 신부님도 우리도 삶의 생기를 어디서 찾을까나?) 어색하게 바른 립스틱의 중딩 여자애들의 입술이 유난히 눈에 띤다. 저 애들은 벌써 전혀 다른 세계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크기변환]20200216_085754.jpg

꽃들도 창조주 앞에서 뽐을 내고 어린이들도 주님의  제단에서 재롱을 부리고 

[크기변환]20200216_095154.jpg


요즘 전화를 하면 시아는 벌써 컸다고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웃음만 짓고 아직은 어린 시우가 조잘조잘 주변 얘기를 전한다. ‘스키 방학이어서(우리네 봄방학’) 어딘가에 가 있나보다. 얼마 후면 시아가 아범보다 키가 더 클 것 같아 걔한테서라도 성씨가문 종자 개량을 볼 수 있겠다.


여인터에서 필요하다는 내 주민등록 초본을 떼러 일부러 뒷산을 넘어돌아 동사무소에 가는 길. 70년대에 꼬끼와 쫍쫍이가 우리 집엘 찾아오던 산길은 그대로인데 내가 빨래를 이고 넘어와 물질을 하던 빨래터엔 정자가 지어졌고 그 밑에 물길에서 흘러나온 샘물은 시커멓게 고여 철망이 둘레에 쳐저 있다. 어디에도 추억을 길어낼 흔적은 없어 나 혼자 언저리를 눈으로 더듬는다.


[크기변환]1581858494766-4.jpg


동사무소에서 문서를 떼고 마을사업을 하는 부서의 공무원을 만났는데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인의원 조카라고 인사를 건네와 어찌나 반갑던지... 내 핸폰에 붙여진 세월호 스티커로 나를 알아봤단다. '태그끼아재'에 해당하는 호천이나 오빠가 내 핸폰을 보면 세월호 스티커 안 보이게 뒤집어 놓는 것과 대조된다. 우이천 물이 좀 많이 고인 곳엔 겨울새들이 이른 저녁꺼리를 찾고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잡혀가는지 산책하는 사람들도 제법 늘었다.


[크기변환]사본 -20200217_170559.jpg


[크기변환]사본 -20200217_170903.jpg


눈 내리는 차디찬 저녁나절 이른 저녁을 먹고 보스코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몰두하고 나는 섀넌 마케냐 슈미트의 미친 사랑의 서를 읽었다. 아서 밀러와 마를린 몬로의 결혼생활. 자기와 놀아주지 않고 글만 쓴다고 "여기는 감옥. 내 담당 간수는 아서 밀러라는 사람이야"라면서 끊임없이 타박하는 몬로를 '산산조각난 꽃병'으로 비유하면서도 밀러는 그미를 사랑하였고, 그런 남자는 친구 노먼 메일러한테서 '세상에서 가장 재능 있는 노예'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아내를 사랑했으니, 사랑은 미친 짓임에 틀림없다. 아니 "미치지 않으면 사랑하기 힘들다."는 게 이 책 전부의 맥락이다. 또 사랑의 그 광기에서 많은 예술이 피어나고 또 파괴되는 조화를 보았다.


[크기변환]IMG_3927.JPG


[크기변환]IMG_3937.JPG


[크기변환]unnamed.jpg


문하연 작가의 다락방미술관을 읽으면서는 까미유 끌도델의 조각 '중년'이라는 작품을 들여다본다. 로댕을 사랑하여 자신의 재능과 삶과 사랑 전부를 로댕에게 수탈당하였고, 정신병원에 갇혀 홀로 눈을 감고 무연고 시신들과 함께 몽파메 묘지에 매장되어 버린 여인. 그런 누이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동생 폴 끌로델은 이렇게 한탄한다. "하늘이 그녀에게 준 재능은 모두 그녀의 불행을 위해 쓰였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라는 열병을 앓는 사람만이 사물을 바로 본다니(그 사물을 만드신 분의 시선으로 본다니) 묘하지 않은가? 인류사에 읊어진 그 모든 사랑 노래가 결국 '사랑'이신 분에게 바쳐지는 찬미가여서, 그분도 '사람 사랑'에 미쳐 외아들을 내놓아 십자가에 매달았다니... 그렇담 하느님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사랑의 노예'이시고 그분이 보이신 사랑은 '산산조각난 꽃병'이어서 그분을 '기이하게' 닮은 저 숱한 예술가들이 저렇게나 미친 사랑들을 하고 갔나보다. 


[크기변환]IMG_393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