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15일 토요일, 흐림


마리아 아줌마는 천식 기침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내가 누구인지를 재차 확인한다. 로마에서 관저 요리사로 몇 해를 함께 지낸 살가운 정이 전해져 기침으로 고생하는 모습에 울컥한다. 우리가 있을 때는 대사관저에 일주일에 서너 번 어떤 때는 매일 손님을 초대했다. 외교관이라는 게 일을 찾아하면 한도 끝도 없고 안 하기로 하면 겨울잠자는 물고기처럼 꼼짝하지 않아도 탓하는 사람이 없다. 


아줌마는 먼저 계시던 대사님이 데리고 온 분인데 그분께 부탁하여 우리와도 함께 있기로 했다. 결혼초부터 손님 대접으로 익힌 습관은 대사관 식탁에서 빛을 보았다. 각국 대사 부부, 바티칸의 고위인사, 로마에서 연학하는 교구 신부님들과 수도회 신부님들, 여러 수녀회 수녀님들, 일반 유학생들, 한인성당 식구들, 그리고 한국에서 오는 손님, 먼 외국에서 찾아오는, 우리가 알기도 하고 소개받기도한 많은 사람... 우리처럼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외교관은 한번 해 볼만한 일이었다.


(벌써 13년전) 대사관저에서의 낡은 사진 한 장

[크기변환]Sia 106.jpg


하지만 주방에 있던 마리아 아줌마는 많이 힘들어 했다. 먼저 대사님이 2년 동안 초대한 손님 보다 우리가 다섯 달에 초대한 손님이 더 많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내보이기도 해서 달래느라 외출도 많이 하게 해드렸다. 아줌마는 알파벳을 몰라 지하철은 못 타고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건물 모양을 보고 유적지를 구분하면서 찾아다녔다. 얼마나 눈썰미가 좋은지 다시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곤 했다, 더구나 관저에서 일하는 자동차기사 릴이나 정원사 꾸마라, 청소부 아이샤와는 50개도 안 되는 영어단어를 암기해 불편함 없이 의사소통을 하며 잘 지냈다.


아줌마는 당신의 개인적 사연엔 일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전화를 해 온 것이다. 이제 80세가 되었고 천식으로 고생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아픈 데는 없단다. 나쁜 사람을 만나 꼬임에 빠져 벌어 놓은 돈을 투자했다가 다 날렸지만 굶을 정도는 아니라면서 하느님은 꼭 필요한 만큼만 남겨 주신다는 신앙 체험을 했다니 그 또한 많이 나쁘지는 않다. 그때 이미 회갑을 넘은 나이었는데 혈혈단신 여자의 몸으로 외국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여러 나라를 거쳐 그곳까지 온 기적의 여인이니 그미의 남은 날 하루하루도 기적이 되리라.


[크기변환]20200215_171726.jpg


보스코는 어제와 오늘 공안과에 가서 수술후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수술경과가 좋아 "세상만물이 이렇게 환하게 잘 보이는 줄 몰랐다!"며 좋아하는 보스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는 말씀이 있지만, 고등학교 1학년부터 안경을 끼고 살아온 그가 두 눈 다 백내장을 제거하고 맑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니 참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 식구 일곱이 모두 안경잽이다! 


[크기변환]20200215_130453.jpg


아래층 두 총각이 밤늦게 돌아오면 아침은 물론 안 먹고 점심까지 건너뛰고 잠만 잔다. 보스코는 애들 배 고프겠다며 깨워서라도 밥을 먹여서 재우란다. 부스스 잠 깨어 식탁에 앉은 모습이 강아지들 같다. 키는 180이 넘는 장대들이지만... 나나 저 청년들은 자는 게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한 개념인데, 보스코는 어려서 너무 많이 배를 곯아선지, 타인의 배고픔마저도 보아넘기기 힘든가 보다.


이제 3월이면 자훈이가 잠시 시골로 내려가고, 그에게 더부살이하던 4촌 정태가 새 집사로 등극하기로 해서 오늘 계약서를 써주었다. 서울집 제6대 집사. 우리가 운이 좋아 좋은 젊은이들을 맞았고, 길어야 3년이면 배우자를 만나 장가들어 새 둥지를 만들어 떠난다. 자녀도 송목사네 셋, 손총각네 둘, 엽이네 하나... 우리한테 손주가 여섯이 더 생긴 셈이다.


[크기변환]사본 -20200215_161848.jpg


[크기변환]20200215_161918.jpg 


[크기변환]20200215_161833.jpg


[크기변환]20200215_161930.jpg


[크기변환]20200215_162033.jpg


한목사가 함께 우리 뒷산을 걷자고 찾아왔다. 오랜만에 쌍문근린공원을 걸었다. '코로나 19 ' 때문인지 산을 걷는 사람이 평상시보다 적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도 쓸데없이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 '여고괴담'들이 생겨난다올해는 별로 춥지도 않았는데 아직 산기슭엔 검게 마른 잎들만 삭막하고부러진 가지 위에 선 오색딱따구리도 보호색으로 검게 변하여 머리를 전기드릴 삼아 구멍을 판다파는 구멍마다 식당 서너 개침실 서너 개육아방으로 제각기 따로 쓴다니 주택이 참 호사스러운 동물이 딱따구리다.


만보 정도를 걸었는데 둘이 걸어선지 시간이 쉬이 지나갔다. 공원 아랫마을 꽃동네는 여기저기 시를 붙여서 골목을 꾸며놓았다. 언제 와도 주인이 없기 마련인 단독주택 주인들에게 호소하는 "검침원"이라는 시가 호소력 있다. "담쟁이"는 도종환 시인의 시인데 안도현의 것이라고 해도 아무도 모른다.그리고 그게 중요하지도 않다.이미 그들은 마른 벽을 타고 올라 손에 손잡고 담을 넘었다.


[크기변환]20200215_162751.jpg

뒷산엔 딱따구리, 이웃집 대추나무엔 개똥지바뀌

[크기변환]20200215_171019.jpg


산을 내려와 우이천변을 걷는데 비가 후득거린다. 한목사는 정릉을 향하여 전철역으로, 나는 덕대 수위실에서 대학신문을 발견하여 고맙게도 신문을 머리에 펴 우산으로 쓴다. 신문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크기변환]20200215_17173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