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4. 금요일, 맑음


사람들이 함께 만나면 놀고 얘기하고 먹는다. 그런데 먹는 부분은 여성들이 전적으로 등장해야 이루어진다. 요즘은 눈치가 있는 남자들이 일부 거들기도 하지만 여자들 마음에는 안찬다. 그러다보니 우리집에서는 아예 음식 만드는 일은 내가, 설거지는 음식 만들지 않은 사람이 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있어 보스코가 한다. 물론 설거지에서도 그의 부족한 5%’는 내 몫이다. 추석은 시댁식구와 지리산 휴천재에서, 설은 친정식구와 서울에서 지내는데, 두 올케가 대부분의 음식을 준비하고 나는 평소 나물과 후식을 책임진다. 오늘은 아주까리 잎과 시금치 나물을 준비했고, 후식은 유과와 과일들을 고루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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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부터 엄마가 못 오신다. 해마다 호천이가 유무상통에 가서 엄마를 모셔와 며칠 지내게 하시고 다시 모셔다 드리곤 했는데, 이젠 그곳 효도병원에 요양하시는 처지라 외출 자체가 힘드시고, 설령 모셔오더라도 몸이 아픈 작은올케가 케어를 도맡기 힘들어졌다


설이면 설빔으로 한복을 먼저 챙기던 보스코가 두루마기에 동정을 달려는 나를 말린다. ‘엄마가 안 오시니 세배도 안 드리는데 한복은 안 입겠다고 한다. ‘있어도 없는 사람이 된 엄마’를 생각하니 목젖에 뜨거운 게 올라온다. 한복을 챙기던 나도 손길을 멈춘다. 인생에 중요한 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공허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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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쯤 빵고신부가 왔다, 명절을 지내러. 큰아들은 멀리 있으니 작은아들이라도 보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아들이 도착하자마자 아들 오면 고쳐 달라겠다고 벼르던 목록, 보스코가 써놓은 컴퓨터 수리 목록이 아들한테 넘겨진다. 서울과 지리산 두 집에 있는 컴퓨터 네 대에 '윈도10 깔기(여태까지 쓰던 윈도 7에서)', ‘사진첩 정리’, ‘인터에서 받아보는 PDF 자료 정리’, 그리고 데스크톱 망가진 프로그램 고치기’... 문정리에서 딸만 일곱이던 이웃집 아줌마 말대로 '역시 아들은 낳고 봐야 하는 기라!'가 저절로 내 입에서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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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아래층 정태의 부친이 아들 맡기고 그간 찾아뵈지 못해 죄송해서인사차 찾아왔노라고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서울집 5대 집사인 구총각이 생각이 있어 휴학하고 무슨 시험을 준비하러 고향에 내려가고, 그 동안 함께 살던 외사촌 정태가 구총각 전세돈을 승계하여 제6대 집사로 아래층에 살 작정이다. 점심을 준비해서 정태 부자랑 보스코랑 상을 차려냈다. 나는 효소단식을 하느라 밥 먹을 처지가 못 되었다


어제는 막내딸작은엘리네 부부가 설 세배를 하러 찾아와 반가워서 저녁을 함께 먹고 한참이나 담소하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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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쯤 돼서 오빠네가 왔다. 명절도 좋고 명절이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더욱 좋다. 이렇게라도 서로 만나라고 조상님들이 명절을, 축제를 마련하셨나보다. ‘우리 큰딸이엘리네는 오늘부터 스무 명의 식구가 와서 북적인단다. 그 집은 나흘 내내 잔치가 이어질 게다. 그미가 좋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미가 그만큼 사람들 마음을 널따랗게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들이 오가고 밥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들이 있다는 건 우리 삶을, 아아, 얼마나 풍성하고 행복하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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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밤늦게 부엌일을 마치고 층계를 올라오며 오늘도 시집 식구 사이에서 고달팠을 큰딸을 불러 지친 목소리를 들으니 핵가족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음식을 장만하다 시집식구들이 한데 모여 대가족을 이루는 며칠간 중노동을 하다보면 지치고 짜증나기도 할 여성들, ‘92년생 김지영들은 이 설날에 무슨 환청을 들을지 착잡한 마음이 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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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처럼 칠순을 넘기는 나이로 자연의 이치대로 임신과 육아를 담당했고, 남녀분업 시대에 남자들이 벌어온 곡식과 고기를 온 식구가 먹을 밥과 반찬으로 만들어내는 부엌일을 위대한 성변화(聖變化)’로 여기고 묵묵히 감당해온 세대에게는 자기한테 오는 사람들 귀찮다 하면 현세에서도 복을 밀어내는 짓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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