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5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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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꾹 감았던 눈을 실낱 같이 뜨고는 고개 돌리기도 귀찮다는 듯 곁눈으로 흘긋 나를 보시고는 다시 감으신다. “엄마! 나 왔어요.” 큰 소리로 말씀드리지만 딸자식이 오든 가든 감지도 안 되는 듯했는데, 정작 떠날 때 엄마 손을 잡고 엄마, 나 이제 가요.” 라고 말씀드리자 내 손을 탁 치며 눈을 흘기시는 모습으로 내가 떠나는 게 싫다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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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씹기 어려워 미음 단계로 넘어갔고, 곱게 갈아놓은 미음 한 공기와 물김치 한 종지가 식사의 전부다. 그것도 넘기기가 힘드신지 눈 감고 오랫동안 입에 물고 계서서 어서 넘기셔요채근해야 화들짝 놀라며 음식을 넘기신다. 그러나 오후에 케이크와 망고, 감과 딸기우유, 캔에든 뉴캐어 등을 고루고루 잡숫게 해드리는 것으로 보아 영양부족은 없겠다


엄마 왼쪽에 계신 할머니는 뇌졸증의 후유증으로 몸의 절반을 못 쓰지만 다른 요양병원에 있다 오신 경험을 들려주면서, 다른데서 환자를 대하는 방식에 비하면, ‘유무상통 효도병원은 정말 천국에 가깝다면서 나를 안심시킨다. 엄마를 돌보는 도우미 아줌마가 엄마에게 바나나 하나를 드려도 곱게 으깨서 정성스럽게 먹이더라며 어느 효부가 그러겠느냐?’며 우리더러 염려를 거두란다. 그분은 일본 추리 소설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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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른쪽 할머니는 정신이 들락거리지만 기운도 좋고 움직일 수 있어 늘 부스럭거리며 움직인다. 그게 좀 소란스러워 울 엄마가 쳐다보자 자기한테 눈을 치켜떴다며 엄마를 때리더란다. (왼편 할머니가 전해주는 얘기에 의하면) 처음 몇 번은 그냥 맞던 엄마가 언제부턴가 작심을 하고 주먹으로 같이 때리는데, 숟가락도 못 드는 울 엄마가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놀랍더란다. '그럼 그렇지, 전순란 엄만데 그냥 맞고 있어서는 안 돼지' 하며 나는 은근히 흐뭇했다. 유아원에 아이를 두고 돌아오기가 너무 걱정스러워 몰래 창너머로 살짝 숨어보니 아이가 너무 잘 놀고 있어 안심하고 발길을 돌리는 심경이랄까?


엄마를 휠체어에 모시고 보스코가 1층부터 9층 까지 한 시간 가량산보를 했는데 이제는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어 하신다. 울 엄마는 유무상통의 가훈대로 정신줄까지 '놓아라' 하셔서 다행이지만, 이모는 당신 어린 시절의 이야기까지 모두 기억할 만큼 정신이 명료하여 실버타운의 생활을 훨씬 힘들어하신다. 94세가 되어 희망도, 기쁨도, 기다림도, 할 일도 없이 우두커니 살아있다는 게 고문이라고 괴로워하신다. 사람이 오가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을 주고받던 활동을 일체 접고  '삶을 그냥 흘려보내야 한다'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맑은 정신으로..., 죽음보다 못한 고문이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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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스코는 살레시오 수도원에 가서 작은아들이 집전하는, 박양웅 신부님의 2주기 미사에 참석했다.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경상도 사나이지만, 1981년 우리 가족이 로마에 막 도착했을 적에, 수업으로 바쁜 보스코 대신 나와 두 아이를 데리고 로마를 온통 구경시켜 주시던 자상한 분이었다. 서울교구 사제로 교회법 연구차 유학가셨다가 살레시오회 로마관구에 입회하신 분이다. 2005년에는 대사관저에서 거행한 큰아들 빵기의 결혼도 주례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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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로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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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은퇴하고 귀국을 하셨는데 몇 달 안 되어 췌장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제 미사에는 1980년대에 로마 한인성당 주임신부를 하시는 동안 사귀었던 분들이 수녀님들과 함께 참석하여 고인의 생전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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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우사방모임이 있어 부평엘 갔다. 한목사랑 같이 가서 우리 대모님도 모시고 나와 두 엘리랑 실비아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그미의 안집에서 다과를 들며 새해를 축하했다. 나이들어 만난 인연이라도 내 딸들이 되어 친자매처럼 사랑을 나누는 품이 정말 보기 좋다. 살아온 면면이 상처입고 주름진 경우도 짓눌리지 않고 털고 일어나 주변에, 또 멀리까지 손을 펼치는 모습은 정말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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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랑은 뜻밖의 순간 예상 못한 곳에서 솟아나와 우릴 엮어 준다그날따라 머리를 높이 치켜 올린 실비아에게 우리는 기억에 남는 명배우의 헤어스타일을 재현했다 하여 '오드리 될뻔'('할뻔'?)이라는 멋진 이름을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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