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31일 화요일 섣달그믐,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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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일요일엔 보스코의 동창들이 왔다. 철들기 시작하며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라 그때 그 시절 그 나이로 돌아가 스스럼없이 잘도 논다. 연말인데도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러 나가는 일 없이 밤 낯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에 끼어 두 거물의 말싸움(논쟁)을 번역하는 중이다.


억지가 4촌보다 낫다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억지에 힘없이 물러난 펠라기우스파를 조금이라도 두둔하여 해제를 쓰느라 1940년대에 나와 절판된 책까지 큰아들 작은아들 시켜서 찾아 보내라고 소란을 피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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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파일로 구한 책을 다운받고 작은아들에게 복사하라고 부탁하는 등, 마치 내가 로맨스 소설 읽듯이, 보스코는 교부책 번역에 정신이 없다. 저런 보스코를 보다 못해 내가 보스코 대자 종수씨에게 친구들 데리고 놀러 좀 오시라고 초청을 했다. 서울집 식탁의 자리가 최대로 늘려도 12개 뿐이라 딴 동창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더도 못 부르고, 한국문화가 언제부턴가 부부가 따로 놀기에 부인들이랑 함께 오시라했다.


젊은 시절 우리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자주도 만났는데 , 이제는 하얀 머리카락조차 다 빠져 80 고개를 오르는 힘겨운 나이들이다. 그래도 만나니 좋고 오랜만에 보아도 좋은 게 동무다. 식사 중 보스코가 왜 살레시오 학교에 들어오게 됐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더니만 사연도 갖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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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초딩부터 말썽쟁이여서 신부님들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사람 좀 되라고, 누구는 자기가 다니던 학교가 없어져버려 그리로 배정받아서, 누구는 공부도 못하고 장래성이 없는데 체육장학생으로 뽑혀서, 누구는 좋은 학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어서 신설인 살레시오학교로 갔단다. (보스코의 경우는 서석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수석합격을 놓쳐 장학금을 못 받게 되었고 [그러면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학교를 못 다닐 처지여서] 새로 생긴 살레시오학교에 수석합격하여 장학금을 받으러) 갔단다. 


처음 시작의 동기는 달랐어도 살레시오 학교에서 받은 3년 혹은 6년의 교육에 다들 감사하고 있었다. 그때는 종교시간이면 땡땡이치고 도망 다니던 철부지들이 지금은 대부분 아내랑 가족을 거느리고 가톨릭신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아는 보스코의 동창들이 모두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또한 살레시오 교육의 성과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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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마지막 날 양주 사는 연술이 서방님이 북한강변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어린 시절에 보스코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일년에 두어 번 우리를 초대해 극진하게 대접해 준다. 47년 전 내가 가출하여 석달을 부안의 연술네 홀어머니에게 몸을 의지하던 1973년 봄(어머니는 집 나온 한심한 큰애기를 당신 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고마운 분이다). 연술이 서방님은 그때 고딩이었는데 금년이 어느새 칠순이란다. 늦깎이로 신학을 공부한 올케는 목사님으로 활동 중이고 서방님은 장로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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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초대 받아 오신 민화백 부부, 여류화가 김화백, 그미의 손님 소프라노 이정애 교수, 우리랑 함께 간 우리 큰딸이엘리가 모두 처음 만난 사이거나 한두번 본 분들이지만 다들 멋진 사람들이어서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속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는 분위기여서 참 유쾌했다.


이교수의 따님자랑이 기억에 남는다. 뉴욕 맨해튼에서 기막히게 잘 나가는 딸이 마흔이 되도록 그 좋은 신랑감들을 다 마다하더니만 고등학교를 겨우 나온, 건축장에서 날품풀이하는 연하의 스페인 총각이랑 열애에 빠져 결혼한다고 해서 엄마를 무척 당황케 하더란다. 그런데 요즘은 전화할 적마다 매일매일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한 남자라고 남편 자랑이 늘어진다나.... 


딸은 그 신랑을 공부시켜 모든 자격증을 따게 하고 대학교를 마치게 한 뒤 건축회사 사장을 만들더란다. 그야말로 미국판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얘기는 자본주의 극단으로 보이는 나라에서도 사랑의 위대함을 재확인하는 희망을 듣는 이들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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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에는 민화백께서 7년전 선물해주신 풍경화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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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들이 좀 무시당하고 자식들의 삶에서 좀 배제되더라도 자신들의 진실한 삶을 찾고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결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이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민화백께서 그려 오늘 우리에게 선물하신 "예수 성면"을 보며 하느님의 아들딸인 우리가 무엇에다 삶을 걸어야 하는지를 그림으로 우리에게 일깨우시는 듯하다.


선거법과 검찰개혁법을 통과시켜 2019년을 마무리하고서 2020년을 맞이하는 이 시각,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리미질을 한다. 흰쥐 띠라는 내년에는 여러 가지가 잘 될 듯하고, 그래서도 우리 모두가 바른 가치관으로 보낼 새해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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