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7일 금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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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가 왔나 보다. 입술이 터지고 입안에 노란 화농이 넓어져 간다, 성탄을 지나 떨어진 베들레헴의 별처럼. 며칠 전 감기 걸려 고생하는 김원장님을 만났을 때도 악수를 피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도 간첩들 접선하거나 마약상 밀매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했는데... 하기야 이 겨울철 공기 중에 퍼져 새 숙주(宿主) 모시려 기웃거리는 바이러스가 어디 한 곳에만 머물겠는가?


발을 뜨겁게 하면 온몸이 더워지고 그 열을 감기균이 싫어할 듯해서 3층에 올라가 커다란 대야를 갖고 내려와 따끈한 물에 벌게지도록 발을 담갔다. 이왕 굳은살이 불어난 김에 밀개로 발뒤꿈치를 쓱쓱 밀어냈다. 겨울이면 발바닥이 건조해지고 굳은살이 생기며 쩍쩍 갈라지곤 하는 보스코는 발뒤꿈치를 밀 적마다 어렸을 적을 떠올린다. 겨울이면 어머님 발뒤꿈치가 피가 나도록 갈라지고, 어디선가 돼지비개를 얻어다 솓뚜껑에 지져 돼지기름을 상처에 바르시더라는 얘기. 어머님의 한많은 삶과 각박한 가난을 그렇게 밀어내시면서도 그분 가슴골엔 삭풍처럼 찬바람이 달리곤 하셨겠지.


울 엄마도 겨울마다 갈라진 발뒤꿈치에 맨소레담이 제일 좋은 약으로 알고 계셔서 귀하게 바르신 다음에는 우리들 손이 안 닿는 곳으로 고이 모셔 두었다. 희미한 알전등 밑에서 옹색한 방석을 깔고 비틀비틀 쓰러질듯 몸을 가누며 발뒤꿈치를 밀던 엄마, 내가 바로 그 나이 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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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오전에 공안과에 나가서 백내장 수술 후 두 주간의 경과를 검사받고 돌아왔다. 왼눈이 새로 넣은 렌즈 덕분에 정말 잘 보인단다. 넣던 약도 가짓수도 줄이고 횟수도 줄이라는 처방을 받아왔다. 


서울집 3층 다락 서쪽 창에서는 인수봉의 끝자락이 겨우 보인다. 그나마 저만큼이라도 남아 보이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예전에 아랫동네 채희문 시인 댁에 가면 그분이 시를 쓰시던 한두 평짜리 다락방엘 올라간 적이 있다. 서쪽으로 삼각산 자락을 내다보면서 길고 낮게 펼쳐진 작은 창문으로도 그토록 아름다운 시를 써내어 이생진, 임보, 홍해리 시인들과 더불어 해마다 우이 시선(詩選)”을 엮어내시던 분이다. 이제는 그분도 몸이 편찮아 정신줄을 놓고 해 넘어간 산그림자가 되셨다는데.... 그래선지 그분의 시는 여운이 늘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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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난 뒤에도

돌아가는 길 가슴 가슴들 속에서

다시금 가로등처럼 불이 켜지는 연극이나 영화가 있듯이

두고두고 별처럼 빛나는 주인공들이 있듯이

내 초라한 생애, 예정된 드라마도

어느 날 시간이 다 되어

막이 내리고 나서도

누구의 가슴에선가 다시 점화되어

오래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를 것인가

아주 작은 별빛으로라도 어디에선가 반짝거릴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있었어도, 별일 아니었던 듯

까맣게 혹은 하얗게 재처럼 스러지며

내리는 막과 함께 영원히 지워질 것인가. (채희문, “혼자 젖는 시간의 팡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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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그렇게 지워지고 잊히기를 두려워한다, '남은 날이 적어질수록'. 어제 이엘리와 한목사와 만나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의 얘기를 나누던 일도 서로의 가슴에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겨두고 싶어서다. 오늘 오후에는 이여인터(이주여성인권센터)’의 허오영숙 대표가 잠깐 찾아주었다. 이웃에 살아도 마음이 먼저 있어야 발길이 따라가는 법, 그러기에 우리집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귀하고 고맙다. 그 사람들 가슴에 지워질 순간까지 내 가난한 존재의 여운이 '아주 작은 별빛으로라도' 남기를 바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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