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일 일요일, 흐리고 비오다


겨울비는 유난히 처량하다. 서방들 먼저 앞산 양지녁에 뉘어놓고 혼자 남은 아짐들은 냉방구들을 쓸어보지만 어느 곳을 더듬어도 따순 구석이라곤 없다. 전기장판마저도 전기가 아까워 밤에 잘 때 잠깐들 켜니까. 여름 소나기에 강물 붇듯 울컥 목젖위로 뜨거운 탄식이 쏟아진다. “아야, 밤 주스러 갔다 영감 산소 옆구리를 봉게 휑하데. 여름 장마에 쓸려간 꼴짝에 아직 풀도 미쳐 못 났드만, 어째 요래 겨울비가 쓰잘데기 없이 온다냐?” 그 아지매 가슴엔 외로움이 겨울비처럼 골짝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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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가는 길, 나는 우산을 쓰고 텃밭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벗겨주었다. 막 싹이 트는 시금치, 상추, 봄채에 겨울 빗맛을 뵈주려고. 요 며칠 푹한 날씨에 배추가 속이 찾나 꾹꾹 눌러보고 다니자 배추들이 기다려 봐유. 비라도 좀 맞아 보고 생각해 볼 께유!”란다.


오늘은 달력 마지막 낱장 12월의 첫째 주. 임신부님이 산청 단성에서 미사를 드려주러 오시는 날이어서 봉재 언니와 미루네도 산청에서 함께 와서 참석하니 썰렁하던 공소가 제법 가득 찼다. 대림 첫 주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매주에 대림초를 하나씩 새로 켠다. 어제 휴천재 마당의 남천과 은목서 가지를 꺾어다 대림환을 만들어 공소 제단에 놓았더니 제법이다. 저 초목도 한해를 마감하며 창조주 곁에서 시들어 가면 보람을 느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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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생활이 허전하고 삭막할 때 친구가 찾아온다는 기별로 설레이듯, 무료한 우리 인생도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기별을 들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인생이 축제고, 우리가 잊을 만하면, 왜 즐거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까닭을 교회력이 일깨워주곤 한다는, 임신부님의 강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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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후 공소식당에서 각자 싸온 음식을 풀어 놓고 함께 아침을 들었다. 진이네는 인절미와 삶은 계란, 사과, 도정 글라라는 호박죽, 운서 비비안나도 계란, 나는 어제 만든 호박파이를 꺼내놓으니 커피에 곁들여 풍성한 대림잔치가 된다. 날마다 우두커니 앞산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이웃을 만나면 할 말들이 참 많다.


오늘 아침은 특별 초대손님 미루가 연꽃차 시음을 해줘서 시골 사람들의 입도 호사를 했다. 자기도 연밭을 갖고 있는 신대충씨는 연꽃 채취 방식과 포장 방식에 호기심을 갖고 이사야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연꽃은 사흘을 피는데 첫날 피고 밤에 오므린 꽃을 새벽에 따는 게 좋다든가, 그걸 어떻게 쪄서 어떻게 진공포장을 하는가에 관해 이사야의 권위 있는 사사를 경청한다. 공소모임은 시골에 살며 서로의 삶의 지혜가 공유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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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면장댁 안젤라 아줌마가 언젠가 모를 심다가 진흙 묻은 장화 채로 안방까지 걸어들어가는 광경을 목도하고 내가 흉을 본 적 있었다. 그런데 엊그제 석박지를 담그다보니 봉지비닐이 모자라 급해서 나도 장화를 신은 채로 방안에 들어갔다. 아짐들 앞에서 그런 자아비판을 하자 부면장댁이 깔깔 웃으며 "음마, 시골 살면 다 그런 기라. 사모님도 이제 촌사람 다 됐고마." 하며 찐한 동지애를 보인다. 아줌마야 혼자 몸이라 그래놓고서도 대충 살겠지만 나는 이튿날 식당채 바닥을 세번이나 걸레질하느라 한나절을 다 보냈다는 점이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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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산청 사는 백교장 선생님이 이웃 사는 허신부님과 함께 점심을 하자고 초대해서 함양 샤브향에서 여섯 사람이 만났다. 허신부님이 원로사제로 퇴임하신 후 불타는 향학열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신다기에 보스코가 자기 집필서인 라틴어첫걸음고급라틴어를 보내드린데 대한 허신부님의 답례였다


70 넘은 나이에도 무슨 공부든 바람직하지만 라틴어 공부(영어라면 여행하면서 써먹는다지만 허신부님은 이미 영어에 능통한 분이다)를 하신다니 특히 바람직하다. 다만 죠르주 베르나노스 소설 시골본당신부의 일기에 나오는 어떤 신부가 하루 종일 근무하고 지쳐서 돌아오는 가엾은 여자를 붙들어 놓고 라틴어 공부를 시키듯이, 가엾은 식복사 가타리나씨한테까지 가르치지는 않으신다니 다행이다. 점심 후 콩꼬물에서 눈꽃빙수와 커피를 먹었고, 해지기 전이어서 손님들은 휴천재까지 방문하고 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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