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8일 목요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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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마루 겨울 꽃밭에선 게발선인장이 백조로 떼지어 날아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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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다는 소문에 동네 아줌마들의 수근거림, 적어도 무는 뽑아야 한다고 작당하는 귓속말이 흔들리지 않고 12월을 기다리는 내 귀에까지 들어온다. ‘그래, 닷새 더 기다린다고 갑자기 커지기라도 하겠어?’ ‘차라리 칼바람에 고생 말고 오늘은 뽑자!’ 배추김장은 다음주 월요일쯤으로, 오늘은 알타리무 김장(무가 워낙 안 커서)을 하기로 정했다.


드물댁도 놀러나갔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어 혼자서 텃밭 무를 뽑아 다듬고 있는데, 보스코는 평소 수시로 나를 찾는 습관대로, 밭까지 따라와 눌러 앉아서 비록 어설픈 손질이나마 무를 뽑아 나르고 김치꺼리로 다듬는다. 오지랖 넓은 마누라 만나 고생이 많다. 무청을 정자 그늘에 널어말리는 일도 보스코 몫이다. 무를 뽑고 다듬고 밀차에 실어 우물가에 옮겨놓고서, 파장이 다 된 시간이지만, 나는 오늘이 마침 함양장이라 읍내로 달려갔다.


그래도 평소보다 물건도 많고 파장에 떨이하는 장꾼들과 흥정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날은 벌써 어두워지고, 머리에 이고나와 짧은 해에 시들대로 시든 텃밭 푸성귀들을 버릴 수도 없고 이고갈 수도 없는 할메들의 애절한 눈빛을 피하기가 정말 힘들다. 동일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나도 김장 무 김장 배추를 심었으니까) 사줄 수도 없으니 더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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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가 고향인 엄마의 입맛대로 나도 무김치에 넣을 황새기를 손질해 넣고 젓갈도 꼭 황새기 젓을 쓴다. 그래야만 엄마 손맛이 난다. 50여년의 김장에 보스코도 내 김치에 입맛을 들였는데 빵기는 언제부턴가 비린내 난다고 안 먹는 걸로 봐서 며느리 지선이의 손맛에 15년간 길들여진듯하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보스코가 그렇듯 빵기도 잘하는 일이다.


겨울 석박지가 나올 때마다 고향 얘기를 하며 하얀 뜨거운 밥에 푹 삭은 김치를 맛나게도 드시던 우리 엄마가 이제는 요양병원에 종일 누워계시고, 고기죽마저 미음으로 드시면서 찬이라고는 겨우 동치미 국물을 찍어 먹여드리는 게 고작인, 가난한 식탁을 마주하신다 생각하니 참 섧다. 어디 우리 엄마뿐이랴? 현대그룹이라는 대기업의 총수 정주영 회장도 마지막이 가까워 오며 누룽지 끓인 것과 동치미 국물이 주 메뉴였다니, 다른 모든 것처럼 산해진미가 늙음 앞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 무를 절이고 양념준비를 하는데, 휴천재 옆길로 이장네 부부가 무를 싣고 내려가며 궁시렁댄다. 구장네 논이 간밤에 멧돼지 떼에 사정없이 파헤쳐졌다고, 멧돼지는 소탕을 해야 한다고 열을 내는데, 땅속에 숨은 지렁이 몇 마리에 목숨 거는 멧돼지도 안됐지만, 수확을 앞둔 무밭을 하룻밤 새 망쳐버리면 농부에겐 환장할 일이다.


이장댁은 엄청나게 큰 배추 한 폭(속으로 따지면 우리 배추의 서너 배 돼 보이는)을 꽃다발마냥 안고 내려가다가 우리 텃밭 배추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 마디. "너무 배좁아서 안 큰다. 드물댁은 옆에서 꼭 훈수를 해야 제대로 하는데... 배잡게 심어야 할 감자는 뗨뗨 심더니만, 왜 배차는 모를 부었데요?" 동네에서 젤로 농사 못 짓는 아짐을 '싸부님'으로 모시는 내 처지가 안쓰럽다는 눈치지만 나 역시 별 볼 일 없는 농사꾼인데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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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한나절에 끝날 일을 금년에는 하루 종일 하고 해진 뒤 어둑해서야 겨우 뒷설거지를 했으니 천하장사 전순란도 이젠 한 물 가 김치 담글 양도, 김치 줄 사람도 숫자를 줄여야겠다. 당장 "김치 받아갈 리스트에서 뺄 사람 순서부터 정해야겠다."는 우리 딸들 성화가 맞긴 맞다. 맘 같아선 "이젠 나도 얻어먹을 나이다!"고 외치고 싶지만....


진이엄마도 올가을엔 불루베리 밭을 새 묘목으로 교체하느라 너무 바빠서 내가 김장을 조금 더 해서 나눠주기로 했다. "칠공주집 셋째니까 나머지 여섯이 한 통씩 해오면 되겠네?"라니까 다른 자매들도 김치를 사먹은지 오래란다. 매해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던 도정 체칠리아까지 수녀님네 '백합된장'을 사먹는다니, 김장도 손수 해먹는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날 것 같다. 세상도 변하고 세태도 변하는데 나만 역주행을 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먹을것 남줄것 알타리김치 여덟 통을 들여놓고나니 마음이 뿌듯한 건 예년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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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마련한 겨울 빔에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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