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2일 화요일, 맑음


크기변환_20191111_144359.jpg


산처럼 눈 쌓인 날 친정에 온 딸이 진통을 한다. 할머니는 방바닥에 볏짚을 깔고 딸의 흰 이마를 언 손으로 쓸어내린다. 새까맣게 소리를 지르고 잠시 시간이 멈춰선 후 아이의 울음이 터진다. 한숨을 돌린 할머니가 부엌에서 물을 데우고 있다. 순간 가슴에 벼락을 치듯 산모의 머리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 딸의 혼이 빠져나가는 끝을 잡고 할머니는 정신을 잃는다.


툇마루에 앉아 담배 태우는 할머니

나는 할머니 곁에 앉아

오동나무 이마 위 푸른 달 속에

어머니를 걸어둔다

토방 앞에 흰 고무신 한 켤레 놓여 있다

기왓장 틈에서 풀들이 흔들린다. (임경자 툇마루)


크기변환_20191111_153324.jpg


며칠 전 선배언니가 올케 임경자 작가가 쓴 산문집 셋이서 타는 자전거를 선물해 주었다. 동생을 낳으러 외갓집에 간 엄마를 따라가 엄마는 아이를 낳다 죽고 며칠 후 동생마저 죽는다. 혼자 남겨져 외할머니 손에 커가는 가엾은 계집아이 이야기.


그렇게 남겨진 딸을 찾지도 않고, 또 다른 여자와 새 출발하는 아버지라는 남자의 무심함과 슬픈 동화처럼 선명한 그림을 들여다보듯 그려놓은 시골풍경은 가슴이 저리게 아름답고 슬펐다. 예전에는 이 모든 부당한 상황을 왜 여자들만 겪어내야 했을까?


그 뻔뻔한 사내들의 무책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리던 풍경에 치가 떨린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내 친구 말남이도 여중생 적 아버지가 새 각시를 봤다는 소문과 함께 어디에 살림방을 차렸다면 엄마는 새 이부자리를 꾸며서 머리에 이고 자기한테는 고추장 항아리를 이어주며 앞장서라하더란다. 그렇게 찾아가 그 살림집에 들여놔주고 아버지에게는 한마디 말도 않더란다.


그러면 몇 달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철이 들어서야 엄마의 썩어버린 마음을 알게 됐고 자기는 그러지 않을 천하에 착하디착한신서방에게 시집을 왔단다. 우리 시댁만 해도 시어머니가 시앗을 보고 고생하다 영양실조에 홧병으로 돌아가셔서 보스코네 사형제도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아버지 없는 세대를 살았구나.


크기변환_20191111_150118.jpg


크기변환_20191111_111717.jpg


[크기변환]20191111_134553.jpg


크기변환_20191111_134329.jpg


어제 그 아름다운 남산의 찬란한 단풍 속에서도 피 흘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친구가 있어 가을의 빛깔이 찬란할수록 더 미안했다. 그래도 과거는 천둥 번개와 흙탕물과 함께 쓸어가 버리고 파아란 가을하늘에 눈부신 단풍으로 현재를 주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한번은 가을소풍으로 남산을 함께 가자고 약속을 하고 남대문 시장에서 친구들이랑 만났다. 실비아의 단골 소품가게에서 아직도 어린 시절의 소꼽놀이에 미련을 못 놓고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깜찍한 인형과 소품을 먼저 보았다.


크기변환_20191111_145355.jpg


크기변환_20191111_150556.jpg


그래도 생선구이 집에서 갈치조림과 모듬 구이로 싼값에 걸게 점심을 먹었으니 행복은 절정, 불만인 사람은 전혀 없었다. 이엘리가 못 가봤다는 서울역 염천교 쪽으로 난 고가도로를 산책로로 꾸민 '서울로`를 구경하고 곧장 남산으로 가을 작별 소풍길에 들어섰다. 남산을 오를 때 옆으로 난 성곽과 어울리는 갈대며, 안중근 의사 동상 뒤로 불타는 단풍, 그 뒤켠으로 노랗고 갈색인 느티나무에 바람이 일어 겨울보다 먼저 노랑눈이 눈부시게 흩날리고 귀여운 꼬맹이 엄엘리가 은행잎을 실비아에게 뿌려주어 내가 영화를 찍었다.’


크기변환_20191111_145933(0).jpg


크기변환_20191111_153754.jpg


크기변환_20191111_145302.jpg


크기변환_20191111_161959.jpg


서로들 아껴주고 따독여주고 힘들면 일으켜 주는 자매애가 돋보이는 친구들이다. 각자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지녔지만 세상을 사는데 상처하나 없는 이가 어디 있으랴? 더구나 이들은 타인과 가족을 이해하고 사회문제를 걱정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상처가 아물어 인생은 고통총량제(苦痛 總量制)라는 이치를 몸으로 그 밝은 얼굴로 보여주며 살고 있다.


크기변환_20191111_150704.jpg


크기변환_20191111_162259.jpg


크기변환_20191111_155145.jpg


크기변환_20191111_154735.jpg


오늘은 두레방이사회의가 있어 다행히 올라온 길이라 참석하고 여늬 때 같은 위임을 면할 수 있었다. 서울에 오면 모두 다 이렇게들 바빠진다. 내일은 또 휴천재로 내려가야 한다.


크기변환_20191112_14415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