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7일 일요일, 맑음


여름이면 아침 7시가 이른 시각이 아니다. 그런데 추분을 넘기고 동지로 달려가는 계절의 아침은 아직도 희뿌연 새벽 그림자가 남아있다. 오늘 공소예절에는 4명의 신자가 공소회장과 오손도손 예절을 시작했다. 우리가 자주 공소를 빠지니(주로 보스코가 초청받는 강연 때문이지만) 다른 때라면 서너명이 공소 예절을 했을 법한데 공소회장님 힘 빠졌겠다


730분이 되자 시작시간을 잘못 안 신자 다섯 명이 더 와서 끝기도를 하고는 일어났다문정공소의 예절 시간은 겨울에는 아침 7시 30분, 여름철에는 아침 7시다(셋째 주일의 본당 주임 저녁미사 역시 겨울에는 저녁 7시, 여름에는 저녁 7시 30분). 내 마음 같아서는 함양본당으로 주일미사를 가고 싶은데 거동이 불편한 공소할메, 차편이 힘든 동네 아짐들 신앙생활도 살펴야 하는 일이 작은 공동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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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앞으로 한 10년 안에, 마을에도 그렇지만 공소에도 아무도 안 남을 것 같다는 예감에 마음이 우울했다. 그러나 공소 지붕까지 씨앗을 날려 산국이 뿌리를 내리고 꽃까지 피워낸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없이도 자연만물에게 찬양을 받으실 터이니 우리의 염려는 쓸데없는 기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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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산동의 데레사님이 보내온 알밤 상자가 어제 도착했다. 그미가 농사짓는 쌀을 10년 넘게 받아 우리 두 식구가 밥을 먹고 있다, 내가 먹어본, 제일 맛있는 쌀로.  내가 본 제일 굵은 알밤도 해마다 가을에 보내준다. 


어제는 한신대학원 후배들이 남원 아영에 있는, 강기원 목사님이 시무하는 갈계교회에 목회 실습을 하러 온 길에, 보스코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강의를 청해 들으러 휴천재엘 왔다. 내 후배 강목사님의 교회는 10여명 교인이 전부라는데, 천막을 만들어 실생활을 해결 하시던 사도 바오로처럼, 강목사님 부부도 콩농사를 짓고 그 콩으로 된장을 만들어 팔아 생활을 하며, 이웃과 같은 처지의 농부로서 보람 있게 살아간다니, 안쓰럽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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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신도수가 수만 명임을 과시하여 예수 팔아 돈을 섬기는 서울의 초대형교회와 목사들을 보아왔기에 저런 후배들이 시무하는 가난한 교회, 민초들과 함께하는 배고픈 교회’, ‘노동하는 목회자’가 끌어가는 교회에는 적어도 예수님은 계실 것 같아서 늘 아름답다.


휴천재 언덕길을 올라오는 잘생긴 한신 후배들의 모습을 보니 정말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평생을 그분과 함께 하겠다는 젊음들이 갸륵하다. 목사님 가족이 모두 온다 해서 아이들 입맛에 맞춰 점심으로 피자를 구웠다. 피자는 구워내는 족족 젊은이들 앞에서, 누에가 뽕잎 먹듯, 사라졌다. '그래, 일 많이 하려면 잘 먹어야지.' 이런 마음이 선배 마음이고 엄마 마음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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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일행은 보스코한테서 한 시간 가까이 '고백록 읽기' 강연을 듣고, 갈계교회가 단체로 구입해서 선물한 고백록을 한권씩 들고와서 역주자인 보스코에게 사인을 받기도 하고, 전순란의 '휴천재일기 달력'도 한 부씩 챙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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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는 서울부터 로마까지 두 발로 걸어서 생명. 탈핵 실크로드운동을 주도하는 이원영 교수님(수원대)이 휴천재를 방문했다. 그분은 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전국을 다니고 있어 과연 탈핵운동을 벌이는 환경운동가답다. 이명박 시절에 4대강 파 헤쳐지는 걸 보고 반정부 운동을 시작했는데, 자기한테 그런 훌륭한 투사의 능력이 있다는 걸 일깨워준 이명박이 고맙단다.


일찍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변절하여 사회를 혼탁케 하는데, 늦게 시작한 일이라 변절할 겨를도 없이 '오로지 직진'이라며 웃는다. 수원대 운영자의 사학비리를 시비하다 파면당했지만 사법부의 판결로 복직된 분이기도 하다. 세상이 모두 돈으로 미쳐 돌아간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분을 보면 좀 부끄러운 줄도 알아야 하는데... 더구나 사람이길 포기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미 잊은지 오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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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보스코는 여름내 몇 차례 뒤꼍의 대나무를 베어 쌓아놓았던 감동 옆 빈터에서 바짝 마른 대나무를 토막냈다. 날잡아서 저렇게 마른 대나무를 태우면 온 동네에 따발총 소리가 날 게다.


늦가을 바람에 휴천재 텃밭에 민트가 한창이다. 서리가 내리면 하루아침에 폭삭 삶아질 터라, 이교수님을 군내버스로 전송하고서 올라와 민트를 베어왔다. 잘 씻어 거실에 걸어 말리기로 묶었다. 긴 겨울,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따끈한 민트차 한 잔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수세미 물로 만든 스킨과 함께 친구들과 나눌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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