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5일 수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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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태풍에 말리다 만 대추가 쉬엄쉬엄 냄새를 풍기더니 날파리가 꼬였다. 잘못하다가는 폭싹 썩힐 것 같아 누구네 건조기를 돌리는 집이 있나?’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다행히 부면장댁이 건조기에 고추, 토란대, 대추를 단체로 말리고 있는 중이어서 혹시 빈 공간이 있나 기웃거리니 건조기 속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식사 중이면 밥상 어귀에 자리를 만들어 숫가락 하나 얹으며 누구라도 끼니를 때우게 하는 여유와 인정이 건조기에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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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물댁은 보기 힘들다. 면에서 하는 노인 일자리에 열흘 동안 다니는 중이다. 그 일자리가 없으면, 이웃 노인들끼리 들여다보고 말벗만 해줘도, 그 집의 도장만 받아 가면 한 시간에 만원씩을 주고 일주일에 두 번을 가게 된단다. 검은굴댁에는 전빵집 아줌마가 가고, 누구네는 누가 가서 친구가 되어준단다. 외로운 노인들에게 말벗품앗이를 시키는 풍경이다.


영감들 건너편 산비탈에 뉘어놓고 아낙 혼자씩만 남아, 하루 온종일 사람이라고는 TV에서 움직이는 그림이 전부니 사람구경이 서울구경 보다 더 귀하다는 말이 간절하다. 용산댁이 요즘 부쩍 더 안타깝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평소에도 정리와는 안 친했지만 집안을 들여다보면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드물댁의 걱정이다. 차츰 치매기를 보이는 노인이 동네에서 한 둘 늘어나는데, 그런 사람들은 면에서 요양보호사를 보내준다. 갈수록 한집에 한 사람만 살다가 앞으로 10년 안에는 온 동네에 빈집만 덩그러니 남으리라는 생각에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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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가을은 어느 새 깊고 우리의 인생도 늦가을이어서 머잖아 서리내리는 날이 오겠기에. 모처럼 찬란한 날씨니 산보를 가자고 보스코와 나섰다. 비온 뒤의 산하는 너무나 눈부셨다. 잠깐을 스쳐 지나는 생이라 해도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진이가 초딩이었을 때 우리랑 걷던 산보 길. 문상 마을을 올라가 '공심래' 한의사댁을 지난다. 지리산을 사랑하여 지리산 등반을 백번도 더 했다던 선생님은 문정공소 헤드빅 수녀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동네사람들 건강까지 챙겨 아픈 사람들에게 늘 한약을 주셨고 오실 때마다 성심당빵을 얻어다 안겨 주셨다. 은퇴 후에 아들들과 내려와 지내겠다고 커다랗게 별장을 지으셨지만 환갑을 갓 넘기고 돌아가셔서 빈집만 덩그러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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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길 끝에는 가난한 사랑의 도피로 행복을 꿈꾸던 황선생댁이 입구마저 가시덤불로 무섭게 우거져 사람의 발걸음을 막는다. 사랑하는 여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남자가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구름처럼 떠나버린 뒤 소유권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더니 이제는 진입로까지 가시덤불로 막혀 두 사람의 따뜻한 사랑을 흔적마저 묻어버렸다. 아직도 그 남자의 가슴에 흘렀을 핏빛 눈물처럼 붉은 꽃무릇만 군데군데 흩뿌려져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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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마을입구 아래편 소나무 숲에 3년전 누군가 멋진 집을 지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인기척이 없어 궁금했는데, 모처럼 차가 서 있기에 사연을 물었다. 그 집을 짓고 간간이 와서 관리해주는 건축업자란다. 그 별장에 장가 안 간 큰아들이 엄마를 모시고 살다가 작년겨울 엄니가 돌아가시자 아들은 떠나버리고 팔려고 내놨는데 작자가 없어 마냥 비어 있단다. “사람이 땅들을 제 이름 지어 불러도 무덤은 우리의 영원한 집 세세대대로 살 곳이니라.” 시편 한 구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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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길이 끝난 우리 동네 입구. 유영감님이 누가 붙여놓은 전동차 광고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젠 무릎이 아파 걷지도 몬하겄어.” 문하마을 노인 중 유일하게 농사짓고 유일하게 나다니는 '바깥노인'이다. 보스코 또래의 팔순 노인이 둘 더 있지만 자리보전하고 누운지 오래. 저녁밥 지을 해거름에 연기오르는 굴뚝이 단 한개도 안 보인다농촌이 소리없이 사그라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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