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28일 수요일, 비오다 흐림


낮에 텃밭에 나가보니 드물댁이 어느 새 배추를 다 심어 놓았다. 아침내 보슬비가 내려 젖은 흙이 성가셔서 내일이나 배추를 심을 생각이었는데... 내가 전화를 해서 사연을 물으니 "놈들이 다 나와 심고 있었꺼등."이라는 대답. 지난번 무를 심었다 말라죽고만 자리에 드물댁과 내가 다시 심은 무씨가 싹을 틔워 하늘을 향해 귀여운 두 손을 흔들고 있다. 내가 서울에 가 있어도 그미가 있으니 안심하고 밭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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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인보성체회 베르디아나 수녀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함양본당 수녀님을 뵈러왔다가 우리 부부가 여기 산다는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기에 빨리 오시라 했다. 20여년 전, 97~8년 우리가 로마 산칼리스도 카타콤바에서 안식년을 보낼 적에 그미는 그레고리안대학교 성서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서로 가까이 오가는 사이였다. 특히 기억나는 일은, 트레비분수 옆에서 피자 가게를 하던 내 친구 수지씨가 그날 팔고 남은 피자를 싸가지고 와서 내게 건네주면, 나는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자동차로 로마를 한 바퀴 돌며 피자배달을 했다. 성체회 수녀님댁과 제리니 살레시오 신학생 공동체에 주로 배달을 했다. ‘잘라 파는 피자’(pizza a taglio)는 영양가도 높고 가격도 비싸 밤늦게 공짜로 배달오는 피자는 때마침 출출하던 수사님들이나 수녀님들에게 반가운 간식거리였다. 베르디아나 수녀는 그 피자로 아침을 먹고 또 간식으로 학교에 싸가며 행복하던 추억을 여태 간직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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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리니 살레시오 공동체에는 한국인 회원으로 이태석 수사, 신현문 수사, 백광현 수사 셋이 살고 있었다. 셋 다 서품을 받고 귀국했지만 이태석 신부는 2010년에, 신현문 신부는 작년에 한창 일할 나이에 하느님 나라로 떠났다. 그때의 삼총사 가운데 백광현 신부만 생존해 있어 그분이라도 먼저 간 두 분의 몫까지 일하여 건강하길 빈다.


99년 1월, 우리가 살던 카타콤바 주택의 화재사건을 기억하던 베르디아나 수녀는  화재의 열기로 십자가의 (플라스틱) 예수님상이 녹아내린 일을 기억하고 그 십자가를 보여달라 했다. 화재의 열기로 벽에 걸렸던 십자고상이 녹아내려 있었다. 

(* 화재사건: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28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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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 때문에 속이 녹는다'고 하소연하시듯 거꾸로 매달린 예수님 상! 얼굴은 다 뭉그러지고 두 팔은 녹아서 끊어지고 몸체는 발등에 박은 못 때문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예수님상을  바로 세워 접착제로 부쳐 놓은 모습이 지금 휴천재 보스코 서재에 걸린 십자고상이다


수녀님은 20년전 불에 녹아 거꾸로 매달린 예수님 모습을 보았던 충격이 너무 강렬했다며 그때 그 모습대로 되돌려놓았으면 좋겠단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수많은 인간들이 얼마나 당신의 애를 태우는지 하루도 편할 날 없으실 테니까 그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예수,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리심을 묵상합시다"(199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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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오니 요셉세레나 수녀는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에 유학가려고 나한테 이탈리아어를 배우다 건강의 이상으로 접었던 분이다. 그 무렵 내가 수유리 성체회 수녀원에 간혹 제빵을 가르치러 다니던 일도 두 수녀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둘 다 수녀원의 참사위원이 되어 중책을 맡고 있단다. 함양본당에서 일하시는 폴리나 수녀님도 함께 오셨다.


손님들이 가고나서 휴천재 마당의 화단 울타리를 낫질했다. 반갑지도 않은 나팔꽃이 새끼줄도 안 묶어줬는데 나무마다 휘감고, 환삼덩굴이 온통 화단을 덮고 있어서 사정 없이 낫을 휘둘러 끊어내고 걷어냈다. 넝쿨식물은 참 싫다. 사람도 남에게 괜히 딴지걸고 시비거는 자를 보면 꼭 넝쿨식물 같아 내가 서둘러 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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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댁이 아침에 심은 배추를 손보러 올라왔다 텃밭에서 나를 불러내린다. 듬성듬성 싹을 틔운 무 이랑 빈곳에 씨앗을 마저 심잔다. 저 많은 무를 대체 누가 다 먹는담! 그래도 땅이 있고 씨앗이 있어 둘이서 마주앉아 빈 데를 채웠다.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니 그분이 키위 놓으시면 누군가 갖다 먹겠지. 이게 농부의 마음이요 농부이신 하느님의 마음이겠다


밭일을 마치고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올라오면서 불이 켜진 보스코의 서재를 올려다보며 혹시나 했다. '아내가 풀베고 무 심고 했으니 뭔가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리지나 않을까?' 하지만 바랄 걸 바라야지....


보스코는 날이 어두워졌는지도,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하고 있었다. ! 오늘이 바로 그 성인 축일이지! 저렇게 나이 들어서도 보스코와 함께 놀아주시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있어 그분께 각별한 감사를 드려할 처지가 다름아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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