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7일 토요일, 맑음


밤새 다리 밑에서 쭈그리고 잔 기분. 머리로는 아직 여름이어서 덥다고 얇은 이불을 덮었지만 지리산 산속에 있는 집안 온도계는 21도였다. 창문을 다 닫고 이불 하나를 더 덮으니 잠이 올 듯 했는데 내일 행사를 두고 준비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아침 다섯 시. 일어나도 너무 이른 시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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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에 나가서 왕산을 건너다보니 오늘 날씨는 쾌청. 내게만 밤이 길었던 게 아니다. 유영감님이 벌써 건너편 포도밭에서 움직이고 있다. 어젯밤 아홉시에야 집에 들어가며 식사하셨느냐는 물음에 가서 밥해야 혀.” 하셨으니 전기밥솥에서 밥 한술 뜨고 잠들면 옅은 잠에 온몸은 왜 그리도 쑤시는가.” 한탄하던 분. 깜빡 눈 부치고 일어나서 먼동에 괭이 들고 휘청휘청 밭으로 나가는 영감님 발걸음이 이즘엔 참 아슬아슬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구장 논두럭과 유영감님 논두럭을 누가누가 더 멋지게 이발시키는지 예초기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제도 어제도 영감님은 논밭 주변에 종일 타는 약’(제초제)을 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제초제 뿌리는 일이 부끄러웠는지 집에 쬐께 남아 있어 성가셔 쳤베릴라고.” 라며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신다.


엄마가 계시는 실버타운에서 있었던 일. 양품점 하던 멋쟁이 아줌마가 양품점을 그만두며 들여온 옷가지와 액서세리를 실버타운에서도 날마다 차려입고 다녔다. 성당은 물론, 식당에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뽐을 내며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옷매무새가 부실해지더니, 10여년 지난 어느 날엔 잠옷 차림으로 복도를 돌아다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환자복으로 복도를 서성거리는 모습이었다. 병약함과 치매를 감당하지 못해 대건효도병원으로 옮겼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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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알프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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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감님이 밭에서 돌아오는 엊저녁, 옷매무새도 흐트러지고, 눈에 띄게 야위었고, 늘 꼿꼿한 허리도 조리 있던 대화도 보고 들을 수 없었다. 저렇게 먹을 사람도 없고 거두어 보내도 반길 사람도 없는 푸성귀들을 새벽부터 밤늦도록 심고 가꾸고, 포도와 고추를 예전처럼 가꾸고 거두는 영감님 모습을 우리가 언제까지 더 볼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삶의 끝자락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이기도 하지만....


맨 왼쪽이 1982년 당시 초딩 모니카, 오른쪽 뒷줄 끝이 산장 여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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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에게서는 짙어가는 밤길을 본다면 젊은이들에게서는 삶의 풍요와 활력을 느낀다. 80년대 로마 유학시절. 해마다 방학이면 알프스 티롤지방에서 여름을 났다. 매년 트레 스카르페리(Tre Scarperi)라는 계곡에서 지냈고 산장 여주인은 몇 해 전 알피니스트인 남편을 산에서 잃고 두 딸을 키우며 산장에 피서오는 손님을 맞고 있었다.


부친 생전의 모니카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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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모니카네 집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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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아가 그린 그림을 선물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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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초딩이던 작은딸 모니카는 엄마와 장애인 언니 클라우디아를 도우며 명랑하게 살고 있었다. 빵고가 세 살 적이었으므로 자주 빵고를 데리고 놀아주었다. 여러 해 그 산장으로 여름을 지내러 갔고 2000년대에는 우리 로마 관저에 모니카가 놀러왔었다


2006년 여름,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에는 모니카가 새로 개업한 산장도 방문하고, 모니카의 남친 그렉도 만났고, 모니카네 본가에 가서 은퇴한 엄마를 만나고 언니 클라우디아가 그려 액자에 넣은 그림도 선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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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모니카가 보낸 페북 사진을 보니 이젠 어엿한 중년여인의 귀품있는 모습이다. 예순 살이 돼가는 언니 클라우디아의 미소짓는 사진도 띄워놓았다. 클라우디아는 아직도 휠체어에서 그림을 그리며, 세월의 그림자를 머리에 이고 있으나 맑은 영혼이 그 눈에 엿보인다


모니카가 지금도 산장을 경영하는 산칸디도(San Candido), 그리고 모니카가 올려준, 발다우리나(Val d'Aurina)의 초원에 뜬 무지개는 우리가 마냥 행복했던 80년대의 젊음과 아름답던 여름날들을 떠올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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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동네 유영감님만 늙고 쇠잔해가는 게 아니다. 80년대 저 어린이들이 중년이 된 지금의 모습에서 우리의 짙어가는 가을 아니 겨울도 보인다. 하지만 가을이면 어떠냐, 우리 삶이 맺어준 열매가 주변에 주렁주렁 저리도 튼실하고 예쁘게 익어가는데? 겨울이면 또 어떠냐? “먼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린 날, 나는나는 산이 될 테야.”라는 노래(산사나이)도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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