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11일 목요일, 흐림


[크기변환]IMG_7782.JPG


보스코의 생일. 1942년생이니 만 77. 본인 말로는 참 오래 살았고 지금 죽는다 해도 기쁘게 그분께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것 같단다, 주님께서 너에게 잘 해주셨으니 고요로 돌아가라내 영혼아!”라는 시편 구절 그대로


매 순간이 즐거웠고, 나와의 45년이 행복했으며, 늘 충만한 삶이었다고 아침기도를 하며 감사의 찬미를 올렸다. 우리의 생을 총체적으로, 한마디로 갈음한다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1957년 이후를 그는 공짜로 더 보태주신 더부살이로 여기고 있다


오늘 생일인 사람이 내 가까운 곳에 두 명이 더 있다. 하나는 우리 막내 시동생 훈이서방님이고 또 하나는 내 남동생 호천이다. 각자에게 전화를 해서 축하를 했다. 내 어린 날 동생을 보고서 끌어안고 마냥 좋아 하던 일, 홍역으로 열이 펄펄 끓으면서도 동생도 아플까봐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호천이는 순수하고 가슴이 따뜻하고 적극적이다. 자기 욕심을 안 챙기고 남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부모님께 꾸중도 많이 들었고, 우직하고 멍청해 보이기도 했다. 어려서는 모기만 물려도 헌데가 나고, 한번 헌데가 난 자리는 쉽게 아물지 않아 늘 피부병을 지니고 살아 땜통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크기변환]1562835201108.jpg


[크기변환]1562835189971-22.jpg


집에서 닭을 키울 때는 개구리를 잡아다 삶아서 모이에 비벼 먹였다. 깡통과 개구리 잡는 막대기, 헌데 난 두 다리는 걔를 생각할 적마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한 장의 그림으로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걔는 애를 못 낳았지만 조카들이 제일 많이 뭉개고 비빈 데가 호천이 집이다. 빵기, 빵고도 우리가 외국 가고 없을 때면 으레 그 집에서 지냈다. 그러니까 동생도 좋은 사람이지만 더 좋은 사람은 올케였다. 조카들도 다 크고 돌볼 일이 사라진 지금은 엄마에게 제일 지극정성을 기울이는 효자 효부가 그 부부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자비를 입을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 다섯 형제 가운데 바로 호천이네 부부한테 해당하는 말씀이다.


[크기변환][회전]20190711_151848.jpg 


[크기변환]IMG_7810.JPG


[크기변환]20190711_152350.jpg 


[크기변환]1562835189971-5.jpg

점심에 함양읍내 샤브향에서 미루와 봉재 언니랑 함께 식사를 하고, ‘콩꼬물에서 빵기가 보낸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이태전에도 미루가 711일에 ... 생일잔치’(미루 남편 이사야 75, 보스코 11일, 미루 13)를 마련한 적 있다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303719


어제 비온 뒤라 공기도 깨끗하고 뜨거운 태양이 숨죽이고 구름 속에 얌전히 있어서 산보하기엔 안성맞춤! 상림 연밭에 연꽃도 만발했고, 친구들과 함께하니 꽃보다 더 향기로운 우정이다. 그 연밭에서 승림씨네 집에서 작년에 만난 친구들, 곧 방곡에 승림씨네 집을 지어준 목수 부부를 만났다. 인도 오르빌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두 부부인데 한 달 간 귀국중이란다. ‘콩꼬물에서 일행을 봤을 때 차림부터 범상치 않아 미루와 관심있게 지켜보았는데 한번 만난 사람들을 깜빡했으니 내 총기도 일흔 고개를 넘어가는 중이다.


[크기변환]20190711_145055.jpg


[크기변환]IMG_7808.JPG


[크기변환]20190711_152119.jpg


[크기변환]20190711_145238.jpg


[크기변환]1562835189971-3.jpg


짧은 인생에 일부러 쓴맛을 볼 필요야 없겠지만, 엊그제 독서회 친구 하나가 늙으신 엄마를 바라보던 한 마디가 앙금으로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가끔 머리를 든다. “우리 엄만 주림과 남편과 자식의 감옥에 갇혀 종신형을 사셨다!” 그러면서도 나는 느그들 키울 적에 한번도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단지 언젠가 끝나겠지, 자식들이 학교 졸업하면, 직장 잡으면, 결혼시키면, 손자 손녀 낳으면 끝나겠지 했단다.’ 그런데 딸의 눈에 비친 엄마의 고생은 끝이 없었다. 그 엄마의 종신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야 두 아들이 멀리 있어도 조금도 걱정이 안 되고, 두 아들 자리를 채워주는 딸들이 늘 가까이 돌바줘 조금도 외롭지 않은 이 시간에 왜 자꾸 그날 그 친구의 다음 한 마디가 떠오를까? ‘내가 행복하다 여겨질 땐 주변도 한번 둘러보라!’던 그 한 마디가 무겁게 드리운 구름으로 마음에 빗방울이 진다.


[크기변환]IMG_7846.JPG


[크기변환]IMG_7882.JPG


[크기변환]IMG_7856.JPG


[크기변환]IMG_7903.JPG

 

[크기변환]20190711_15160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