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15일 월요일, 맑음


제주에서 내일과 모레 오전에 보스코의 강연이 있어 오늘 김포에서 비행기를 탔다. 우리를 초청한 엠마오연수원신부님들은 판공성사를 봐드리러 제주의 여러 본당엘 나가셔야 하는 제일 바쁜 시기라서, 하늘을 날고 바다를 건너는 섬나라에서도 나는 기사 자격으로 따라가야 한다


혼자 다니는 걸 싫어하는 보스코니까 핑계도 좋고, 제주 있던 아들이 서울로 올라와 맥이 좀 빠지기는 하지만 바다와 어우러지는 유채꽃이며, 백화가 만발했을 한라산을 다시 본다는 일은 지리산의 묵직한 산만을 보아온 기분과 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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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같으면 외국에서 돌아 올 때는 말남이에게 데리러 나오라하고, 떠날 때는 수락산터미널까지 데려다 달라 해서 공항버스를 탈 터인데 그미가 가고 없으니 아쉬운 일이 한둘이 아니다. 동네에 새집이 올라가도 고도제한은 지켰는지’, ‘도로는 규정대로 내놓았는지,’ ‘조망권과 일조권까지 법규대로 확보되었는지따져주는 사람이 없어 동네사람들은 벙어리냉가슴이다. 그미가 살아 있을 때는 그미한테 불만이 컸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그미의 필요와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남았다.


내 양쪽 아래 어금니를 뽑아내고 나니 정상적으로 음식을 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하기야 위장이 좋지 않아 늘 고생하던 내가 요즘처럼 적당히 씹어넘기는데도 소화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람 몸은 어려움을 당하면 비상체제를 가동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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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딱딱한 빵을 (어금니가 없으니) 씹을 수가 없어 우유그릇에 뜯어 넣어 먹으려니까 개죽이 따로 없다. 예전에 산칼리스토 카타콤바 크노스(CNOS)의 아침이면 별반 먹을 게 없는 수도원 식탁에서 쟌카를로 신부님이 우유사발에 빵을 뜯어넣어 수저로 드시면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아구 드러워. 우리나라에서는 바둑이나 그렇게 먹는데." 라고 놀리며, 일부러 보라는듯이 질기디질긴 로세타빵에 버터와 치즈 그리고 잼을 듬뿍 발라 맛나게 먹어 보였다.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신부님은 내 놀림에도 허허 웃으시며 "그래, 20년 후에 보자." 하셨는데, 이젠 내 어금니가 이렇게 없어도 이빨빠진 갈강쇠, 새암가에 가지 마라. 새우한테 침 맞고 붕어한테 뺨 맞는다.”고 나를 놀려주실 신부님도 안 계신다. 하늘나라에서 내 합죽이 꼴을 보시고는 "술란, 너 맨날 날 놀리더니 참 안됐다!" 하실 게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그 강가에서 지난날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분들을 그리며, 머지않아 내가 나를 알던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될 날을 구시렁거리지 않고 받아들일 맘 준비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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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떠오르자 평상시에 별로 느끼지 않던 것이 한꺼번에 화~악 다가온다. 좁다란 남한땅 어딜 내려다보나 하늘을 찌를듯 솟아오르는 바벨탑들! 우리나라는 '완존 아파트 공화국'이다. 나즈막한 집은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인다. 그나마 남아있던, 비탈진 땅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던 개미골들도 싹 쓸어버리고 거기마저 아파트들이 들어서는 중이다


밤이면 뾰족한 교회 종탑마다 붉은 네온으로 피흘리는 십자가들의 풍경과 쌍벽을 이루는, 도회지의 끔직한 모습. 인간의 욕망과 망상으로 처참하게 수난당하는 골고타 언덕들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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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도착하니 오랜만에 맑은 날씨란다. 랜트한 차를 운전해 가서 교구청에 들려 보스코가 강주교님과 반 시간쯤 얘기를 나누고, 그 앞 식당에서 설렁탕으로 저녁을 먹고, 이시도로 목장가까이 엠마오 연수원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요즘 묵고 계신다는 스무 명 가량의 사제들은 모조리 본당 판공성사를 주러 나가시고 수녀님이 우릴 맞아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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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웃집 '숨비소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빵고신부가 살던 집이어서 밤산보를 가서 둘러보았다. 빵고 후임 이현진 신부님도 판공성사 주러 자리를 비우고 청소년 셋이 놀다가 '성하윤신부 부모님'이라고 반가이 우릴 맞는다. 아들이 여기 없어선지, 파스카를 향하는 상현 달빛이 아스라해선지 이시도로 목장에서 돌아오는 밤길은 유난히 쓸쓸하고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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