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3일 수요일, 맑음


우리 동네는 음력 정월이면 당산나무에 너풀대는 하얀 천 조각이 묶인 끈을 얼키설키 둘러 준다마치 사랑스런 처녀들의 댕기처럼. 마을 앞뜰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천 조각들은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그 한쪽마다 동네 오메들의 한 해 기원이 담기기 때문이다. 오메들이 바라는 기도의 제목은 한결같이 내 새끼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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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스님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란 책을 읽었다. 얘기 중에 속가 할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할머니는 대체 무슨 기도를 올리시느냐?’고 여쭈어보니 "우리 강아지가 어른이 되면 원하는 대로 깃발 날리면서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지."라고 하시더란다. 할머니께 기도하는 법을 누구에게서 배웠느냐고 여쭈어 보니, 할머니는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라 했단다.


예전에는 보통 우리 할머니들이 성황당에 빌거나 집안 귀퉁이 마다 무언가를 모시고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올리는데 우린 그런 모든 것을 미신이라고 칭했다. 혜민스님은 기도하는 대상은 끊임없이 변할지언정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만은 신들의 이름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거다라는 얘기다. 혜민스님은 스님으로써 예불을 마치고 법당위에 뜬 별들을 보고 할머니와 똑같은 방법으로 칠성님께 할머니를 위한 기도를 했다니 불교가 갖는 포용성에 감탄이 간다.


나이가 드니 앉은 자세가 좀 불편해도 결리고, 결린 곳이 쉽게 회복이 안 되어 상비약이 꼭 필요하다. 요즘 보스코가 하루는 부정맥, 하루는 심장이 무엇에 찔리는 듯, 하루는 두드러기, 오늘은 허리가 결려 힘들다며, 매일매일 새로운 메뉴로 나를 긴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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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서강대 철학과에 있을 적 일. 갑자기 목소리가 갈라지고 말소리가 잘 안 나오는 듯 하다 더니, 어디 붙여놓은 광고지를 보았던가 보다. 의사는 빨리 수술을 안 하면 곧 목소리를 잃을 것이오.’라며 당장 입원하고 수술 날짜를 잡으라고 독촉하더란다. 아내 없이 병원에 혼자 간 일도 처음이려니와, 진료를 받고 수술 날자와 수술비 걱정을 하느라 무진 고민을 하다가 내게 실토를 하였다


우선 우리가 잘 아는 여의도성모병원호흡기내과 과장님께 상의하기로 했다. 과장님은 정성껏 목을 보시고는 강의하는 교수치고 목에 이런 폴립 정도는 보통입니다. 목이 콱 막혀 도무지 소리가 안 나오면 그때 오세요.’라고 했다. 그 뒤 그의 목은 평상시로 돌아왔고, 그의 고민도 단번에 사라졌다. 지금도 서울에 어마어마하게 큰 병원을 짓고 비싼 장비를 들여 놓았다고 광고하는 병원을 보면 곤충을 유인하는 잔혹한 육식식물(肉食植物)처럼 보인다.


그가 어딘가 매일 아프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아무데도 아픈 곳이 없어졌다. 빵기가 밤에 보이스 톡으로 전화를 해와 나더러 무릎 아픈 것? 수술한 눈은? 임플란트는?’하고 묻는데 어디도 아픈데 없이 다 멀쩡하다고 말했다. 다 보스코 덕이다. 병고(病苦)도 부부총량제(夫婦總量制)라고 할까? 그를 위해 오늘도 엄천보건소에 가서 배부르게 약을 지어왔다. 대부분 안 먹을 테지만 정신적인 의지는 된다. 휴천재 텃밭의 매화가 많이 벙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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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에 가는데 드물댁이 배를 앞으로 내밀고 팔을 휘저으며 어딘가 부지런히 간다. ‘새로 지은 집 할메병문안 간다기에 보건소에 같이 갔다가 가자고 했다. 할메는 두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인공연골을 넣었다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식들은 멀리 있고 도우미도 없는 산속에 이웃들이 가끔 들여다 보는 게 전부이니 무릎이 아픈 것 보다 외로움에 회복이 더 더딜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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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이아제가 새로 동네 이장이 되어 호구조사를 나왔다. 이 동네 가굿수가 46세대란다. 우리 부부 두 사람이 사는지 확인하고 서명을 받아갔다. 숫자는 저렇지만 빈집이 상당수고 할메들 혼자 사는 1인가구다. 어디 아프더라도 들여다볼 사람도 돌봐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노인이 되어 움직일 수 없으면 도회지로 가나 보다


도회지라면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저물도록 한길에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을 잠재우는데 효과가 있을까? 서양 가면 아파트 창문마다 할메들이 한 사람씩 초상화처럼 붙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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