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9일 토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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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난초 꽃대 실한 것을 분지르고 마음이 상해 난초에게 너무 마음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 호기심은 나도 못 말린다. 난초 화분 서너개를 살펴보니 겨드랑이마다 꽃대를 준비하고 살그머니 올리면서 꽃으로 피어날 꿈을 꾸고 있는 새 촉들이 열 개도 넘는다. '대박!!!' 떡잎을 따주고 꽃을 피울 때 고생 안하도록 도와주고 곁에 있는 다른 화분들도 손질하다 보니 아침나절이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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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코끝을 스치는 야릇한 냄새! '앗차차!!!' 점심에 떡국 해 먹으려고 가스 불 위에 사태고기를 삶고 있었네! 식당채로 달려내려가니 고기는 숯으로 변했고, 아깝다는 생각보다 저 압력밥솥을 어쩌나, 버릴 수도 없고! 이럴 때 제일 고생하는 건 손. 눈은 걱정만 하고, 코는 시간이 흐르면 차츰 냄새가 약해지겠지만, 압력밥솥은 눈으로도 시간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


서울에서 간혹 동네골목을 가다 보면 멀쩡한 냄비가 탄음식물이 담겨진 채 버려져 있는 걸 본다.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렇다. 아무도 안보는 곳에다 땅을 파고 묻어버리고 싶다그런데 우리 며느리가 시집온 첫해, 내 생일에 독일에서 사다준 압력밥솥을 그럴 수는 없다. 우선 석탄이 된 고깃살을 긁어내고, 식초를 넣어 끓여서 철수세미로 닦고, 계란껍질을 부셔 넣어 닦다가 가는 모래로 다시 닦는데... 대충은 닦아졌지만 거무튀튀한 상처는 고스란히 남았다. 뚜껑의 고무 바킹이나 부속품도 교체해야 한다.


젊은 처자에게 혼을 빼앗긴 중년남자가 가정이 깨지는 처절한 아픔을 맞는 암담한 심정이랄까? 물에 담갔다 꺼내놓았던 난초를 제 자리에 갖다 놓으려니까 처음 같이 예쁘지 않다! 드디어 중년남자는 현실에 눈을 뜨고 자신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가 깨닫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랄까? 아내가 받아 줄지는 저 압력밥솥의 부품이 과연 있을지 알아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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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으러 내려온 보스코, 코를 벌름거리며(그에게서 유일하게 발달한 오관) ‘뭘 태웠어?’ 딱 한마디 묻는데 나더러 어쩌라고?그래  전순란이 사고쳤다!!!’ 버럭 소리치고  아침나절 고생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끓여준 떡국에서 떡을 골라먹고 만두는 내 그릇에 넘겨주며 잠자코 아내의 사연을 듣는다.


오후에 날씨가 흐려져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폐지를 태웠다. 예전에는 꼭 종이를 모아다 서울까지 싣고 가서 폐지 줍는 할머니나 아저씨에게 건냈는데, 이젠 돈이 안돼 그 일도 않는다고 힘들게 가져오지 말고 밭에서 태우란다. 폐지를 다 태우고 나니 이번엔 내 몸에서 연기 냄새가 풀풀... 나야 씻으면 되는데 부품 찾아 고쳐놔야 할 압력밥솥이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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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려 마을로 내려갔다. 아침내 유영감님 논에 큰 돌을 실어다붓는 트럭 소리, 포크레인이 오가며 시끄러웠는데, 다른 때 같으면 새참이라도 챙겨 드렸을 텐데... 압력밥솥을 태운 내 죄가 크다.


유영감님은 악바리 강아지가 먹이를 엎었다며 키로 모래를 쳐내고 있었다. 개야 주둥이로 잘 골라 먹을 텐데 영감님 깔끔한 그 성격은 아마 겨울 추위에는 강아지에게도 신발을 신기고 싶으실 게다. 나이 들어 이젠 힘에 부쳐 논두렁을 예초기로 돌릴 수도 없어 세 마지기 논을 하나로 통일하고 축대를 쌓으려는 중이란다. ‘이젠 몸이 못하면 돈이 해야 할 나이여!’ 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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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 들러 동네아짐들과 새해인사를 나누고 '무호박고지떡'을 한 조각 얻어먹으며 보니 안 보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크듯, 못 보는 사이에 할메들은 폭삭들 늙었다. 영감님들이 거의 다 세상을 버린 지음에 저 아짐들이 떠나고 나면 이 마을 앞뜰 농사는 누가 지을까?’ 마을 앞 폐교처럼 버려질 논들이며 폐가로 남을 동네 집들... 


머쟎은 세월에 찾아올 농촌의 현실에 우울하기만 한데 흰 눈이 어깨 위로 한 송이씩 내려앉는다. ‘먼 날 걱정까진 하지 말아요. 그때 일은 그때 가서나 걱정하세요!’ 쓰다듬는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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