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7일 목요일, 흐림


미세먼지로 흐린 날이 아니고 순수하게 흐린 날이다. 이런 날을 만난 지 얼마나 오래 되었나? 먼데서부터 눈발이 흩어져 지리산 하봉을 넘어온다. 가끔 구름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미는 햇살이 따사로운 창가에 앉아서 화분들을 다듬어 준다. 시든 꽃잎을 따내고 해님 쪽으로만 고개를 내밀어 자칫 쓰러질 듯한 화분을 빙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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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위에 불기 없는 방에서 꽃대를 올린 양란을 들여다 보다 온기가 있는 방으로 옮겨주었다. 작년에 미처 분갈이를 못해 주었더니 그만 꽃대 하나가 화분 아래쪽으로 머리를 박고 쩔쩔매고 있다. 조심조심 대궁을 일으켜 세우다가 그만 뚝 끊어져 버렸다. 보스코는 그냥 두었으면 혼자 제 살길을 찾았을 텐데...’ 하며 내 급한 성질이 일을 망쳤단다. '나도 아무것도 안하면 부러뜨리진 않아요.` '나는 그냥 두고 기다리고 있지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냐!` 그가 살아가는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그렇게 놔두면 꽃도 못 피우고 그냥 사그라질 텐데....’ 꽃대를 부러뜨리면서도 손을 보는 게 내 인생철학이고.


꽃송이가 아홉 개나 달린 멋진 양란 꽃대가 꺾어진 것도 억울한데 성질마저 급하다고 나무라면 더 속이 상한다. 그는 내가 왜 속상한 지도 모르고 나한테 툭 한마디 던지고는 서재로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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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카스에 일기를 올리려 보스코의 서재에 가서 핸폰을 들고 나오는데 그가 안 보이기에 온돌방에서 쉬나 보다했다. 그런데 그가 서재에서 나온다. ‘? 아까 못 봤는데 어디 있었어?’ 라니까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데 내가 아무말 없이 자기 앞에 놓인 핸폰만 들고 나가더란다. 안경을 안 쓰긴 했지만 이젠 뭐든 한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여보, 그럴 땐 날 불러 세워요.` 라고 말을 했지만 멀쩡히 책상에 가서 핸폰을 들고 나오면서 책상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안보이는 맹목이라니... 종일 머리에서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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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스.선생댁에 올라가 점심을 함께 했다. 시년하례식이랄까? ‘인간승리체칠리아씨는 간당간당하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오뚜기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2019년의 출발점에 다시 섰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니의 생명력을 두고 늘 감탄한다. 그 많은 곤경과 사고, 그리고 큰 수술을 거치면서도 그니의 천사가 늘 그녀를 굳게 잡아주고 있는 게 내 눈에도 보인다. 요즘 스.선생에게 좀 어려움이 있어도 언제나처럼 좋으신 하느님의 보살피심이 있음을 그는 믿는다, 워낙 낙천적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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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기도를 마치면서 보스코가 소파에 자릴 잡고 눕는다. 부정맥이 심하게 나타났다. 맥박이 100을 넘는다. 보통 한 시간쯤에 사라지는데 오늘은 거의 자정까지 서너 시간을 지속한다. 혀 밑에 넣는 나트륨을 찾아도 떨어지고 없고... ‘동병상린(同病相燐)’이라는 말은 안 아파보면 그 사람 사정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정이 넘자 맥박도 가라앉고 숨결이 고르게 그가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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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매달 열댓 권의 잡지가 온다. 보스코는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거의 못 읽지만 나라도 잡지를 만들고 보내주는 사람들의 성의를 보아 잡지마다 한두 꼭지라도 읽는다. 가톨릭다이제스트2월호에 나온 장원석신부님의 글을 읽고서 하느님이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부르시는 방법이 참 다양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병자성사 주러 온 사제가 '아씨~ 시간 맞추라고 그랬잖아?'라고 짜증을 냈단다. 가족이 다 같이 기도하던 마지막 시간, 아버지의 임종인데 어떻게 시간을 맞춘다는 말인가? 그 순간 결심을 했단다. 나는 꼭 좋은 신부가 돼야지. 정말 내 마음을 주는 신부가 되자.’ 그에게는 ‘남에게 정말 친절하려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옷, 로만 칼라가 필요해서 경찰제복을 포기하고 사제성소를 택한 청년의 절실함을 하느님은 잘 거둬주셨다. 꼭지 마다 발행인 윤학 변호사의 순박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잡지다.


그 밖에도 전라도닷컴, 경향잡지, 공동선, 치빌타 카톨리카,우리 , 시조(時兆)「가톨릭일꾼환경운동연합, 새벽별, 참 소중한 당신, 영성생활, 인드라망」, 분도「살레시오가족,... 매주 오는 가톨릭신문과 사제단의 빛두레, 계간지 가톨릭평론, 아시아문화... 몇 가지를 돌려가며 보는데도 자정이 훌쩍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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