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일 목요일, 맑음
입이 다 터졌다, 임플란트를 위한 치과치료로. 혼자 중얼거린다. "이건 뭐야, 돈 내고 입 찢기고 반항도 못하고?" 어제 의사가 이빨을 갈아서 구멍을 뚫는데 얼마나 어깨에 힘을 주고 버텼는지 오늘은 어깨를 들 수가 없다. '아프지 말고 살아야지. 아프면 돈은 돈대로 나가고 인간의 품위가 말이 아니네....' 양쪽 어금니 다 쓸 수 없으니 앞니로 오물오물 음식을 먹는다. 파파할메가 따로 없다.
보스코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친할머니 모습은, 이가 다 빠져 돈주머니처럼 오무라진 입으로 귀닳아진 놋수저로 고구마를 긁어 드시던 광경이란다. 그 모습이 정말 신기했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런데 오늘 내가 그 사람 앞에서 딱 그렇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왜 여자들은 늙으면 입주변이 바늘로 뜨듯 조글조글 해지느냐?”고도 내게 묻는다. 아마 평소에 나한테 잔소리를 많이 들으니, 남자들의 여망대로, 입을 꿰매버리고 싶어서 '바늘로 뜨듯'이라고 했을까? 과연 마을회관에 모여 앉은 할매들 입들이 다 그렇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난 친구들 입을 보니 그들도 그래지기 시작했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요 몇 달 엄마가 뭔가를 드시다가 자꾸 뱉아내서 주변이 더럽다는 불평을 듣는데 오늘 보니 나도 밀감을 먹으며 섬유질을 못 씹으니 즙액만 빨아먹고 나머지는 뱉고 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엄마는 어느 날 아침 앞니가 후두둑 옥수수 알처럼 한꺼번에 빠져버렸다. 뼈가 없어 임플란트도 할 수 없고 틀니는 노인들의 인지로는 간수하기가 힘들단다. 억지로라도 해드리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언젠가 소리가 안 들린다고 해서 보청기를 해드렸는데 귀에서 자꾸 찍찍거린다고 안 끼셨다. 우리가 뭐라고 나무랐더니 아예 보청기를 갖다 버리고 당신도 어디 두었는지 모른다 잡아떼셨다. 딱 너댓살짜리 아이여서 틀니도 그렇게 버려질 게 뻔하고... 치과 선생님도 노인 잡지 말고 해드리지 말란다. 참 서글펐다. 하기야 긴 세월을 놋수저 하나로 버턴 할머니도 계셨으니 그래도 요즘 노인들은 호강이다.
연술이 서방님이 아들과 직원 한 명이랑 셋이서 함양에 왔다고 전화를 했다. 몇 해 전까지 4대강 공사 일을 했었는데 이제는 물길을 되살려내는 일을 다시 시작하는지 늘 바쁘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조경(造景) 마스터를 땄다.
독일의 라인강이 어떻게 망가졌다가 어떻게 생태복원을 통해 살려냈는지 너무 잘 알기에 이명바끄네 때 공사를 하면서도 내심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샤브향에서 만나 점심을 대접했는데 나는 옆에서 죽만 한 그릇 얻어 먹었다. 그러나 다음 코스인 콩꼬물에서 아포가토와 눈꽃빙수는 무리 없이 먹었다.
‘가평에서 온 촌사람들이라 함양 도회지에서 처음 눈꽃빙수를 먹는다’고 우스개소리를 들으니 지리산 가까이 있어도 함양은 나름대로 소비도신가 보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친구들은 산속에 시골에 갇혀사는 답답한 느낌을 하소연하곤 한다. 어제 만난 친구도 ‘남들은 넓은 도시로 결혼해서 떠나는데 나는 밖에 나가 공부하고 결혼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갇힌 세계로 돌아와 있더라’고 푸념했다. 보건소아짐도 여행을 하려면 산이나 바다가 아닌, 도시로 가고 싶다고 했다.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 매일매일 반복되는 ‘성촉절(聖燭節: 그날 한 해에 쓸 초를 성당에서 축성받아 가는 2월 2일. 가톨릭에서는 성모봉헌축일이라고 부른다)의 마법에 걸린 사람의 얘기다. 날마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제와 똑같은 2월 2일이어서 같은 날이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이다. 어제의 실수와 아쉬움을 다시 보충할 수 있는 나날, 그래서 무엇도 책임지고 진지하게 할 필요가 없는 세월이라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까? 사람이 한번 살고 또 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일러주는 영화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요?" "무슨 날인데요?" "오늘이 바로 내일이야!" 하면서 마치 신이나 된 듯 못된짓을 다 해보던 주인공이 한 여인 리타의 사랑을 얻고 나서야 2월 3일로 넘어간다는 줄거리.
이 영화가 가르치듯 시골이든 도시든,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전혀 나를 속박하지는 못한다. 시간이 나를 싣고 물처럼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펠라기우스 논쟁서 한 권을 번역해 윤문을 마치고 오늘 최교수에게 넘기게 되었다는 보스코는 그날이 2월 2일이건 2월 3일로 넘어가든 말든 누에가 뽕잎 먹든 하루하루를 책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