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일 수요일, 맑음


새벽 첫차를 타러 나서는데 왕산위로 손톱만큼의 하현달과 건빵에 섞여 있던 별사탕 같은 작고 예쁜 아기별이 가까이에서 얼굴을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었다. 터키 깃발 그대로다. 서울 가는 길이라 카메라는 없고, 급한 대로 핸폰으로 그 아리따운 그림을 담아 보지만 물방울만 가득 아쉬운 자취를 남긴다. 얼마 후 귀여운 아우님 윤희가 그 달을 보았냐며 비스므레하게 찍힌 달을 올렸지만 내 망막에 선명했던 그 달과 그 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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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딱 맞춰 집을 나섰는데 요즘 읽는 소설 창가의 또또처럼 해찰을 하다 보니 차시간이 늦어 어쩔 수 없이 함양 다음 역에 해당하는 수동으로 내달아가서 버스를 붙잡았다. 첫차가 마을마다 돌아 40분이나 늦는다고 그저께는 불평을 했는데, 오늘처럼 차를 놓치면 그 다음 마을에서 올라탈 수 있는 시골버스의 여유로움이 이렇게나 고마울 수가!


내 친정 전씨 집안은, 내가 유별난 문빠인 것 못지 않게, 기질상 도저히 평범할 수 없이 극성맞은 태그끼아재가 한 명 있다. 그리고 ‘보통 태그끼아재가 한 명, 정치엔 전혀 관심도 재미도 안 두는 막내가 있고, 여동생은 나와 비슷한 정치색을 갖고 있다. 두 자매가 그나마 지금처럼 깨인 것은 전라도남자들에게 시집간 덕분이다. 아무튼 5형제가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 판도와 비슷한 지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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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극성맞은 태그끼아재, 서북청년단 우두머리쯤 되는 시숙을 마치 독립운동가처럼 자랑하거나, 그 시절 그가 타고 다녔던 미군 찝차며, 쫄병이 문을 탁 열면 라이방 쓰고 점잖게 내리던 시숙 모습을 찬탄하며 묘사할 때면, 나는 부끄러워 보스코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지난번 제주4.3평화공원에 가서 내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던 부끄러움 말이다.


정치색은 그렇지만 어린 시절 동기간으로서 나를 무척 살갑게 대하던 오빠의 잔정은 한 번도 잊은 일이 없다. 어제 내가 치아로 고생하고 임플란트 경비를 걱정하자 구체적으로 선뜻 도움을 베풀어준 것도 그 오라비다. 새해 첫날에 둔기로 얻어맞은듯한 깨달음!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상이나 생각이 달라도 살속 깊이에서 흐르는 혈육의 정은 긴 세월 속에서도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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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가 좀 못되어 차가 서울에 도착하고 단선생님의 우정치과에 당도하니 '이빨 두 개 심을 기둥은 오늘 세워 주지만 그제 발치한 어금니의 자리를 덮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 어제가 휴일이어서 그 부품을 치공실이 미처 못 만들었단다. '그럼 또 내일 와야 한다는 말인데...' 아연해 서 있던 나를 보더니 4시까지 기다리면 그 시술도 해주겠단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입을 벌리고 기둥을 세우고 나니 마취기운으로 정신도 멍한데다 갈 곳 없는 나를 보더니 단선생님은 당신이 쉬는 방을 내주며 거기 머물러도 좋단다. 책을 보면 시간이야 쉽게 가니까 고맙게 여겼고, 더구나 병원에서 시켜다 주는 죽까지 먹고서 편하게 시간을 보냈다


오빠가 내 동생한테 잘못해주면 너 혼날 줄 알아!’라고 협박했다더니 역시 울 오빠가 이빨이란 걸 단선생님이 벌써 알아차렸나 보다. 4시에 부품이 제작되어 그제 발치한 자리에 뭔가 뚜껑을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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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530분 버스를 타고 함양에 도착하면 9시인데 아침에 내 소나타를 주차해둔 수동 가는 읍내 버스도 끊기고 택시를 타자니 그렇고 걱정이 한짐이었다. ‘그래도 내가 함양에서 얻은 제일 큰 선물이 느티나무 아우들인데 나를 걸어가게야 하겠나?’ 싶어 차자씨에게 전화를 했다. ‘나 오늘 이빨 빼고, 임플란트 기둥 심고, 어지럽고, 차도 없고, 다리도 없고...’ 한참이나 우는 소리를 하다가 나 수동에다 좀 실어다 줄래?’ 하고 본론을 꺼냈더니만 걱정 말고 어여 오세요’라는 차자씨 대답. 참 시원시원하고 귀여운 아우님들이다.


산청의 미루도 대기하고 있을 테지만 거리가 좀 멀고, 어제 보니 공장 짓는 그 큰 공사를 해내느라 얼마나 실질적 고생과 맘고생을 했을까 안타까웠다. 그래도 든든한 이사야가 있어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고, 늘 긍정의 힘으로 기나긴 터널을 헤쳐 온 미루니까 올해는 성모님 은총이 가득하리라 믿고 기도하며 견뎌내려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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