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7일 월요일, 맑음


나이와 상관없이 남녀 모두에게 여행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밤에 몇 번이나 깨어나 시간을 살핀다. 그때마다 보스코가 ‘6시에 알람을 해 놓았으니 안심하고 자라는데 마치 철없는 막내딸 소풍가는 날 챙기는 자상한 아빠다. 일어나 다시 가방 속을 점검하고 가져갈 것이 더 있나 둘러보니 저 여자가 집을 통째로 넣어갈 생각인가?’하듯이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이 '수상해!'.


아침은 안 먹고 공항에서 간단하게 먹겠다고 했다가 시간이 넉넉해서 먹고 가겠다니까 그의 손이 바빠진다. 야쿠르트에 계란과 커피. 간단하지만 아침으로는 충분하다. 짐을 골목 끝까지 들어다주고 눈이 내려 살짝 언 언덕길에 또 '꽈당!' 넘어질까 뒤에서 나를 지켜보는 그를 의식하여 당당히 똑바로 씩씩하게 걷는다부부는 서로 지켜봐 줄 때 똑바로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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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잘 아는 사람!' 살면서 서로 사랑해 본 일이 없다는 아내와 헤어져,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지난 시간을 돌아보자면 후회도 많고 우울도 하고, 무엇보다 외로움이 예리한 칼날처럼 비집고 들어와 갈수록 틈새를 벌려놓을 게다. 그 상채기가 점점 넓어져 삶의 기운이 그 속으로 죽음처럼 가라앉는다던데... 


주변에서 나이 들어 헤어지는 부부를 보면상대만 눈앞에서 없어지면 금방이라도 행복이 비둘기 날개를 펴고 날아들 꺼라고 들뜨지만 여간해서는 그런 경우는 흔치않다. 어디서나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얼마 전 그를 만나 평생 누구를 사랑하지도 누구에게 사랑 받지도 못했다면 그 인생이 너무 가엽지 않느냐? 한번이라도 뜨겁게 사랑할 사람을 찾아보라고 권한 일이 있는데 오늘 그의 표정을 보니 뭔가 좋은 조짐이 보여 나까지 설렌다. 사랑은 나이와 상관이 없이 모든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그 설레임 자체가 끝없는 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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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 친구들과 함께하는 '제주 나들이!' 지리산에서 살다가 바다를 본다는 설레임은 아마 그니들도 달뜨게 하리라. 나도 처음엔 함양에서 같이 떠나기로 했다가 서울 일정이 지체되어 김포에서10시 30분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아우들은 30분 정도 먼저 내려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정씨와 윤희씨는 렌트한 차를 가져와 둘이 앞에 앉아 윤희씨는 지도를 읽어주고 희정씨는 제주도 봉고운전기사가 되었다.


오늘은 빵고신부가 일하는 청소년지원시설 '숨비소리'엘 들리기로 했고, 가는 길에 있는 '생각하는 정원'에 들렀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점심을 먼저 했다. 다들 허기진 시간이니 무엇인들 입에 달지 않겠는가? 부른 배로 느긋하게 정원을 보았다. 


'생각하는 정원'은 1968년부터 농부 성범영이 제주 현경면 저지리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1만2천평 대지에 7개소 정원과 폭포, 연못을 잇는 돌다리, 그 아래 평화로이 노니는 비단 잉어떼, 우리나라 고유수종인 정원수와 분재, 특이한 형상의 괴석과 수석이 주인의 열정을 보여준다. 쎌카봉을 가져온 미정씨가 신이 난 우리를 담아내고 소녀다운 우리 정옥씨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빵고신부가 일하는 '숨비소리'에 도착하니 정성껏 마련한 다과로 우리를 맞는다. '숨비소리'가 절망적인 상황의 청소년들의 마지막으로 힘껏 내뱉는 숨결이 되어 새로운 삶으로 달려나가길 빌며 우리 엄마들은 내 아이들을 생각했고, 그럴수록 살레시안들이 하는 일을 고마워했다. 30분도 미쳐 안되는 시간 꿈결에나 보았듯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오는 어미는 오로지 성모님의 손길에 아들의 손을 잡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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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은행 제주 수련원은 서귀포시 표선면 일주동로에 위치해 있고 바로 바다와 접해 있어 넘어가는 해를 침실 창으로 내다보다가 바닷가로 내달리면 물속에 잠긴 해를 건져 올릴 수도 있겠다. 농협 회원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4인실이 하루에 10만원 정도로 저렴하다.

윤희씨 큰딸이 만난 귤을 갖고 찾아와 딸없는 이들을 기죽이고, 저녁을 안 먹어도 충분할 만큼 우리는 풍광에 취하고 벗에 취한 채 잊지 못할 제주의 첫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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