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4일 토요일, 맑음


다섯 시가 미처 안 된 새벽. 보일러실 윗쪽 문상 마을로 올라가는 길가에 풀이 두 자는 자랐다. 우리에게 자기네 논을 내어준 구장(물론 돈을 받고 팔았지만 시골 사람들의 자기 땅, 특히 논에 대한 애착은 마누라보다 좀 더 중하고 자식하고 거의 비슷한 비중)은 자기네 논두렁을 돌던 윗동네 길을 아예 우리 땅에다 금을 그어 다 넘겼다고 전해온다. 그러니 길은 우리 땅이고 길가의 미화 활동도 어쩔 수 없이 우리 몫. 더구나 자기네 논으로 가는 75mm 고무관도 우리 땅으로 나 있으니 우리가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 같다. 자기 논을 내 주었으니까.


하기야 유영감님도 우리 텃밭을 통과하여 당신네 논으로 도랑물을 끌어가는데 그 긴 땅을 통과하는데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고 벼농사는 천직이니 각자 입에 볍씨가 들어가는 한 모든 사람이 협조해야 마땅하다는 당당함이 동네사람 모두에게 불문율 처럼 통해서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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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아침에 서너 시간을 열심히 낫을 휘둘러 천하를 평정했다. 보스코도 나와서 뒤꼍 오죽의 교통정리를 하고 집 가까이로 다가오는 산죽은 모두 쳐냈다. 다리도 없고 신발도 없는 풀들이 기운도 좋다.


내가 이웃 얘기를 쓰다보면 그 얘기는 이렇고’ ‘저 얘기는 저렇고라며 지인들이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니들 얘기가 꼭 맞는다는 보장도 없다. 또 시골 아짐들은 작가로서의 소질이 다분하다. 살아온 이야기가 모두 소설로 담아내도 손색이 없을 뿐더러 내 얘기를 소설로 쓰자면 책이 열두 권이라는 긍지가 빈말이 아니다.


아낙들이야 신세타령에 곁들여 빈말로 그치지만 영감들은 환갑을 넘기면 저런 얘기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다 돈푼께나 있으면 아예 대필작가를 불러다 출판까지 한단다. 그러고 나면 자녀들은 부친의 파란만장했다는 일대기를 지인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느라 고생이 여간 아니다. (며칠 전 오빠에게 들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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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읍내의 소문도 듣다 보면 그게 그 얘기 같은데 버전이 다르다읍내 안과병원의 폐업 사연도 여러 버전이다. 의사가 간호원과 정분이 나서 본마누라가 뒤집어놓고 갔다거나, 어느 할메 눈 수술을 잘못해 실명을 하게 되자 아들이 낫을 들고와서 거덜내자 병원문을 닫고 말았다거나, 도회지로 크게 차려 나갔다거나...


금산 사는 친구가 인삼진액과 더불어 삼복에 삼계탕 해 먹으라고 수삼을 보냈기에 함양 가는 길에 몇몇 친구에게 나눠주러 챙겼다. 진이 엄마는 오늘 쵸코베리 따러 일꾼을 불렀다는데 날이 워낙 덥다 보니 자손들이 일나가는 걸 말렸는지 아무도 안 와서 진이 엄마 혼자만 일하러 갔단다. 그니 대신 나는 내일 있을 공소미사 후의 다과회에 쓸 음식을 장만하러 읍에 나가야 했다. 읍내 나간 길에 희정씨와 윤희씨도 보고 주변소식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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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씨는 단독을 지어 이사 가서 집 관리와 농사짓느라 얼굴이 보기 좋게 그을었기에 집 관리가 힘드냐?’ 물으니 남편과 '알바'가 일하고 자기는 논단다. ‘시골에서 알바는 어떻게 구하고 시급은 얼마나 주나?’ 물으니 알바는 자기 딸 주원이가 하고 시급 1만원을 준단다. 인심 좋은 사용자다. 더구나 알바가 풀을 깎을 때는 사용자가 전기선을 붙들고 뒤따라다녀야 한단다. 제발 사용자 얼굴만 타고 속까지는 안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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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고 산길을 달리는데 멀리 가까이 산 위에 흰구름이 멋진 쇼를 펼친다. 오다 가다 서서 보다 해찰하며 30분이면 오가는 읍내길을 두어 시간 만에 돌아왔다. 종일 책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자판기로 두드리는 보스코가 더위에 지쳐있기에 테라스에 상을 펴고 저녁식사를 했다. 빵 한 조각과 과일이지만 어느 임금의 식탁이 이처럼 풍광 좋고 풍족스러울까! 테라스 건너 멀찌감치 솔숲에 백로 한 마리가 외로이 앉아 있다 어둑한 해거름 속으로 날아간다. 


여름 밤 초저녁 하늘에 전갈좌가 힘차게 꼬리를 곧추세우는 시각, 일기를 쓰고 침실로 들어가니 남쪽 창으로, 서쪽 창으로 산바람이 서늘해 보스코가 이불을 끌어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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