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1일 월요일, 흐림
종일 수십 통의 전화가 온다. 우리 지역구인 함양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인천, 광주,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에서까지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가상번호’를 받고서 하는가보다. 그러나 "투표 이미 했습니다."라는 대답에는 꼭지가 풀린 풍선에서 바람 빠져 나가듯 '풀썩' 전화를 끓는다. 그들이 유권자에 대한 책임감과 관심은 한 장의 표를 받을 때까지, 정확히 딱 시간만큼 뿐.
보스코의 입술이 마치 에디오피아 수르마족 여인들의 입술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제 텃밭에서 배봉지 싸다 '깔따구'에게 물렸다, 하필 입술을! 입술에 끼워 늘리는 접시는 없지만 볼썽 사납게 튀어나와 얼마나 처량해 보이던지 보건소에 가서 해독주사라도 맞자고 집을 나섰다.
보건소에는 한남마을 할메 한분이 먼저 와 계셨는데 아마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보건소 선생님께 늘어지게 ‘밉기만 한 할베’ 흉을 보았나 본데, 우리를 새 손님으로 받아 처음부터 재방송을 하신다.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하는디 그놈의 몹쓸 노망이 들어서도 아흔이 다 되도록 살아남아 이리도 속을 쎅이네. 열여덟에 시집와 지금 내 나이 여든 하난데 육십 년 넘어 살고도 내만 보면 '할매, 누꼬 ? 와 안가고 여깄노? 빨리 가삐라!` 하는 기라. 그래도 며느린 알아보고 '저 할매 뉘꼬? 빨리 지그 집에 가락캐라!' 하는 기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보스코. 내가 잠깐 보건소 소장님과 얘기하는 짬을 이용해서 그 할메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시골에서도 선거는 꼭 하러 가시라. 여태까지 해 왔듯이 꼭 1번을 찍으시면 되요. 표를 왕창 줄 텐데 모조리 짝대기 1번!” 그런데 할매가 더 똘똘하다. "나도 알어. 우리 동내에 서씨 큰집이 있는데 세동 살어. 서필상이랑 서아무개 찍으라카드만. 내 그럴 끼구만." 비록 낫 놓고 'ㄱ'자도 모르고 겨우 짝대기를 놓아야 1자를 아는 할메들도 아들 손주 성화에 할베들보다 세상 이치를 더 빨리 알아챈다. 생고집에 틀이를 떡떡거리며 태극기(+ 성조기, + 일장기?)를 들고다니는 영감들보다 훨~ 낫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운 현실도 슬기롭게 헤쳐 나가며 긍정의 힘으로 가정 모두의 등불이 되기도 한다.
휴천재 현관 신발장 위에 딱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먹이는 중
내가 읽던 잡지 중에 제일 좋아했던 잡지가 「녹색평론」으로 오랫동안 구독해 왔는데 아쉽게도 폐간이 됐고, 요즘은 황풍년 선생이 펴내는 「전라도닷컴」을 즐겨 읽는다. 이번 6월호 잡지에 (지난 5월 5일) '숭늉 같이 구수하고 묵은지같이 개미지고' 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가 실려 있다. 거기서 81세의 김정순 할메가 자신의 '겁나게 남아분 인생'을 풀어놓았다. 그분의 인생에 뭐가 저리 ‘겁나게 남았나?’ 궁금해 읽어 보았다.
“시집가서 먹을 게 없어 동네서 6만원 꿔갖고 새우젓 장사로 겁나게 남아부러! 오리 걸어 일곱동이 물동이로 바닷물 퍼다 두부 만들어 겁나게 남아부러! 7개 부락에서 곡식 받아 곡식 장사해서 겁나 남아부러!” ‘놀음하는 남편 땜시 딸 셋 다 개도 사람도 쌀밥 먹는다는 도시로 식모로 내쫓고’, 이 나이까지 사느라, (마누래가 버는 쪽쭉 돈을 가져가던)남편의 도박 빚 갚느라, 형편 풀리는 대로 다 갚고 겨우겨우 살아온 할메의 인생 결론이, “채우는 자루가 짝을수록 겁나게 남아분께 그게 인생이어!”라니 여인들만이 가질 소박한 행복에 나 또한 미소 짓는다.
아래층 진이네가 올 들어 처음 블루베리를 땄다. 동네 아짐 세 명, 함양 인력송출회사에서 세 명(남자 둘 여자 하나)이 왔는데, 도회지에서 막 귀농해 ‘생존알바’를 뛰나보다. 소풍나온듯 부푼 세 '도회지 사람' 모습에 슬그머니 짠한 생각이 든다. 가물던 하늘에서 오늘은 비마저 오락가락하여 정신 사납더니 5시쯤엔 정말 장대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나절에 파밭에, 모종 옮긴 이랑에 조루로 물주는 걸 하느님이 보시고 “물은 요롷게 주는 법이여!” 하시나 보다.
내일은 드디어 북미회담! 뉴스를 보면서도 마음 바닥에 깔린 불안을 걷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오늘 그토록 가물었던 논밭에 내려주신 소나기처럼, 우리의 생각과 소망 그 이상의 것을 우리 겨레에게 그분은 마련하셨을 게다. 저렇게 큰판을 깔아놓고서 뒤집는다면 ‘세기의 담판’은 ‘세기의 사기판’이 되겠지. 전 세계가 싱가포르에서 저렇게 소란한 것을 두고 어느 기자(경향신문 김진호)가 우리 아낙들도 알아듣게 글을 썼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111939001&code=970100
보스코의 재작년 글 한 토막: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296581
휴천재 텃밭의 당근들이 우주선처럼 커다랗고 예쁜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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