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4일 토요일, 비온뒤 흐림


연록색 세상에 비가 내리면 그 투명하고 선명함에 넋을 빼앗긴다. 마당의 단풍과 산수유와 인동초도 지하에서 봄세상으로 놀러온 차표라며 연초록 이파리들을 흔들어보인다. 서울집 테라스 앞에 세운 은행나무 기둥은 올해도 새순을 올린다. 얼마나 질긴 생명이면 뿌리와 잔가지 모두를 잘라내고 줄기만 세웠는데, 십년 넘게 죽지 않고 해마다 새순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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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둥을 잘라온 정선생댁집터가 헐리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온지 어언 10. 주인댁은 의정부 아파트로 이사갔고, 마당의 커다란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바깥주인마저 세상을 떠나고 안주인만 살아계시다. 집터에서 그 거대한 은행나무가 잘려나가던 날, 그분들을 기억하려고 내가 다듬어온 큰 가지 하나가 10년전 그날처럼 테라스에 기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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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만에 한국 살레시안들은 사제만도 80여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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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사 온 78년에도 '태영엄마'는 한복에 앞치마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복장이었고 평생 단아한 모습을 간직한 채 늘 넉넉하고 다감했던 분이어서 그 가족을 떠올리는 일은 언제라도 가슴을 따스하게 한다. 그분과 이웃 해 살아온 30년 세월이 고맙고 그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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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처럼 우리 네 식구가 다 만나는 날! 어제 관구관에서 거행된 서품식에 참석하러 제주에서 올라온 빵고신부가 11시에 도착하더니 형이랑 차를 몰고 화계사 뒤편에 사는 성훈씨를 데리러 나갔다. 빵기가 서울에 오면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느라 너무 잘 먹기 땜에 집에서라도 소박하게 먹자고 오늘 점심은 지리산에서 가져온 산나물로만 밥상을 차렸다.


두릅, 엄나무순, 가죽나무순, 부추나물과 부추김치, 열무김치와 파김치, 버섯된장찌게, 갈비찜.... 그런데 가죽나무순을 보고 그걸 따려다가 내가 축대에서 떨어져 다쳤다고 보스코가 아들들에게 일러바쳤다. 얘기를 들은 빵기는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시우 시아에게도 절대 못하게 하는게 나무 타는 일이라고, 그걸 할머니가 해서 되겠느냐고나무란다. 빵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렇게 해서 우리를 먹이는 걸 우리가 좋아하겠느냐고, 다시는 나무에 올라갈 생각도 말라고’ 큰 소리로 꾸짖는다


두 아들에게 꾸중을 듣고 나니 억울하고 원망스러워 "여보, 나 욕먹으니까 그렇게 좋아? 아들들 가고 나면 내가 다 갚아 줄꺼야!" 했더니 "내 말은 도통 안 듣잖아? 당신은 아들들한테 혼 좀 나야 돼!" 늘상 혼자서 내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보스코는 내가 아들들한테 잔소리를 들으면 그렇게나 신이 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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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했나?’ 속상해 토라졌다가 작년 여름에 한남마을에서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다섯 아들이 아버지 제삿날 내려오면 먹이고 챙겨 보내겠다고 밤마다 올갱이(다슬기)를 잡으러 엄천강에 나갔다. 밤새워 전등을 켜고 잡아온 다슬기를 삶아 하나하나 바늘끝으로 까서는 봉지봉지에 넣어 냉동실에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끼 낀 바위에서 미끄러져 할머니는 그대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 제사에 오려던 아들들은 어머니 부고를 받고 황급히 달려와 장례를 치르며 냉동실에 얼려진 다슬기 봉지를 마당에 던지며 통곡을 했다. "이까짓 올갱이가 뭣이라고 죽는다냐!" 그래도 옆집 할매들은 "고노무 올갱이 아까버 죽겠드만... 오매가 고로코롬 고상해서 장만한 것인디...."라고 혀를 찼다. 엄마와 자식 간에 서로 알 수 없는 게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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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어제 구총각이 내 생일을 앞당겨 사온 케이크로 후식을 들었다, 총각은 시험기간이라 점심에 참석을 못했지만... 성훈씨는 식사 후에 19시간 비행기를 타고 칠레로 떠난단다정부에서 임명된 직함만 서너 개나 될만큼 인권활동을 하느라 장가도 안가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세상을 향해 언제라도 달려갈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오늘 대화중에 북미대화의 장소가 어디로 정해질까?’ 내기를 걸었는데 성훈씨, 빵기, 나 셋은 평양을, 보스코와 빵고는 몽골을 꼽았다. 어찌될지 우리 모두 흥미진진하다.


빵고는 8시 비행기로 제주로 떠나고, 나는 수술한 영심씨를 보러 갔는데 다리께에서 남편과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뚝뚝하던 남자도 살아가며 아내가 귀한 걸 알아가니 그 커플이 사랑스럽다. 영심씨도 아프고 나서 남편에 대한 정을 새삼 확인했을 것 같아 다리수술이라는 병상이 가져다 준 선물일 게다. 그 사랑 서로들 오래오래 간직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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