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3, 흐림


아침에 일어나 숨을 쉬어 보니 역시 가슴이 뻑뻑하며 아프다. 내 모습이 딱했던지 우리 큰아들 하는 말 "엄마, 아빠랑 같은 날 죽겠다면서 그러다가 작은아버지처럼 돌아가시겠어요? 그럼 아빠는 어떡하고?" "걱정마. 그렇게 팍 쓰러져 딱 죽는 것도 복이야. 다른 사람 고달프게도 않고.... 내가 죽으면 너희 아빠는 하고 그대로 따라 죽을 껄." 내가 이 대화를 미루에게 전했더니만 "꿈 깨세요, 마님. '접시꽃 당신` 도종환 장관 보세요. 그 절절한 시를 보면 곧 가신님 따라 죽을 것 같아도 새 각시 만나 너무 잘 살 잖아요?” 마치 남은 사람 걱정일랑 말고 안심하고 가시와요라는 말 같이 들려 오기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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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내 친지들도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돌려보면서 각기 떠난 님’ 처지가 되어 흐뭇한 상상을 즐기다 그 시인의 재혼소식을 두고 '이건, 배반이야! 나쁜 인간 같으니라구!' 욕하며 흥분하기도 했었다.


우리 외숙모님은 환갑이 막 지나 돌아가시며 아는 여인에게 남편을 부탁하고 떠났다. 보스코 동창 하나는 아내가 떠나며 절대 재혼 안 한다고 내 앞에서 약속하세요라고 졸라서 엉거결에 그러마고 언약을 했고, 얼마 뒤 딸이 돌싱으로 돌아와 살림을 챙기고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쳐 20년이 넘은 지금도 홀아비로 살고 있다. 이렇게나 산술이 복잡하니 억울해서라도 앞으로는 내 몸 내가 간수하며 안전하게 살기로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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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민영진 박사, 김명현 언니 부부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인위적인 연명거부의향서)를 썼다고 사진까지 올리셨기에 우리 부부는 이미 써놓았지만, 법적으로 명확치 않아, 함께 그 사무실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


민박사님 부부는 조계사 앞의 안식교 채식식당 ‘만채우라는 곳에서 우리한테 점심까지 대접하고 광화문 신문로 가까운 각당복지재단’(www.kakdang.or.kr)으로 우리를 데려가 주셨다. 점심을 함께한 한목사도 평소에 자기도 그런 생각을 했노라 며 따라나섰다.

(관심있는 분은... [상담전화 1588-0075] http://www.LST.go.kr )


우리가 찾아간 재단 실무자는 수주 수일내 사망이 임박한 임종기 환자임을 의사가 인정할 때 연명치료를 않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를 중단하겠다는 각서임을 설명해 주고 문서를 작성 등록해 주었다. 또한 마지막 가는 길을 보다 평화롭게, 통증완화만 시도하면서, 가족의 보살핌 속에 남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주선해주는 호스피스 이용의향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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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이 있을 때 내 마지막 길 절차를 선택함으로써 내 인생의 주인은 끝까지 나임을 선언하는 셈이다보스코는 70년대에 E. 퀴블러로스의 <인간의 죽음(Death and Dying)>을 번역 보급하였고 호스피스 연수회에 '죽음의 신학적 철학적 의의'를 강연다니던 사람이니 보건복지부가 시행에 들어간 '연명의료결정제도'가 만들어진데 나름대로 사전 공헌을 한 인물이다. 


커피 대접을 받으면서 '의향서'를 작성 등록하고 기념촬영까지 했다. 사진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회로 '데스마스크'를 떴다지만(십여년 전 최태화 화백이 우리 둘을 미리 떠준 마스크가 집에 있다!) 언젠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나면, 가족이나 의료진에 둘러싸여 '치~즈' 하면서 찍는 '임종기념촬영'도 나올 법하겠다. 


사무실을 나와 보스코는 전철로 집으로 가고, 세 여자는 광화문 청사까지 걸어가 한목사 일을 잠시 기다려주고, 광화문광장에서는 세월호 공방에 들리고, 시청앞을 지나 남대문까지 걸으면서 한목사와 돌절구 같이 무겁게 마음을 누르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도 서로의 속이야기를 말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지우시는 짐은 그걸 딛고 일어나 당당히 설 수 있는 능력을 저울질하며 주신다는 한목사의 '고통총량제' 얘기가 대견하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라던 욥의 자세에서 위태로운 우리 믿음도 빛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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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시장으로, 또 집으로 (만보기로 무려 16,000보가 기록될 만큼) 걸었더니 피곤도 하다. 5대집사 구총각이 들어와서 이모님 생신을 축하한다면서 케이크 상자를 내민다. 주민등록번호 땜에 카드회사나 지인들로부터 오늘 뻘쭘한 축하를 받곤 하지만 내 생일은 4월 23


내가 두 아들을 배아파서 낳은 날들은 잊을래도 잊을 수가 없고 귀한 남편이 귀빠진 날도 꼬박 챙기지만, 시집온 뒤로는 찾아먹지 못한 날이 여자로서의 내 생일. 아무튼 내일 점심에 집에 오는 두 아들과 손님, 보스코와 구총각이랑 함께 잔치를 벌이려면 아침부터 부산스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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