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2일 목요일, 맑음


부산 달맞이성당성모회 회원들이 엠마오 소풍을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왔고 온 길에 문정공소에서 미사를 하고 보스코의 강의로 성모님 얘기를 들었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을 성모교(聖母敎)’라거나 마리아교라고 빈정거리는 걸로 미루어, 내 보기엔 구교에서의 성모님 파워는 요즘 집집에서 엄마의 위세만큼이나 크다.


달맞이성당도 오늘 온 사람들(성모회)이 신부님 호명출석대로 38명이나 되니 아주 활발한 단체임에 틀림없다. 회장 세라피나씨는 나와 동갑인데 차분하고 다감하여 함께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배려한다. 신부님 또한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 분위기가 팍팍 느껴진다. 본당 분위기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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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 떠날 준비로 미사 후 곧장 집으로 올라왔다. 꽃화분들을 막딸이 물주기 편한 장소로 옮기고 떠나기 전 넉넉히 물을 줬다. 서울 가서 이웃들에게 주려고 나물을 뜯고, 쪽파는 뽑고, 부추와 파슬리를 베어냈다.


 토요일에 집에 온다는 두 아들에게 가죽나무순을 먹이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뒤꼍에 4미터 정도 되는 나무여서 순을 따려면 힘들지만 내가 엄만데오기로 한 발은 언덕을 밟고 한 발은 나뭇가지를 밟고 섰는데 그만 발밑의 흙이 무너져내리며 비탈로 떨어졌다. 그 순간 작년에 잘라낸 큰가지 그루터기에 명치를 받혔더니 숨이 헉~ 하고 막혔다. 다리가 부러질 일을 그 나무가 막아준 셈이지만 안경은 찌그러지고 사방이 나무에 긁혀 쑤시고 아프다.


강연 끝나고 올라온 보스코가 내 몰골을 보고 기막혀한다. 쥐박이는 아니어도 찌익~’은 해야 겠기에 "봐요 봐, 성염이 만나 찢어지고 부러지고 망가진 전순란을!" 느닷없는 내 타박에 어이없는 얼굴을 하던 보스코, "나 만났기에 그 정도로 망가진 거니까 다행이라 생각하구려."


용인 미리내 유무상통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으면서도, 엄마를 휠체어에 앉혀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도 엄마의 사위어가는 기억을 이것저것 헤집어보았다. 오늘은 엄마의 결혼 얘기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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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유무상통'에 입소한 첫해 엄마는 이 9층에서 호수를 내려보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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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715일이 엄마가 기억하는 결혼 날짜다(다음에 다시 물으면 날짜가 바뀔지도 모른다). 철원에서 판사생활을 하던 우리 외할아버지(윤대영) 댁으로 신랑(전문규: 외할아버지 배재고등학교 후배여서 즉각 혼사가 성립됐단다)이 평강에서 장가를 오더란다. 이모 기억에 짜리몽땅 신랑이지만 평강 부잣집 아들에다 일본에서 법대를 나온 인물이 짐꾼들에게 예물과 잔치음식을 지우고 오더란다'대동아전쟁' 말기여서 모든 물자가 귀하고 성대한 예식과 잔치가 금기시되던 시절이어서 단촐한 결혼식이었단다


이전(梨傳)을 나와 철원 가까운 동성국민학교 고등양성소에서 선생(제 때에 초등학교를 못 다닌 여자들에게 기초교욱을 시키는 과정이었는데 '청년훈련소 지도위원'이라 불렸단다)을 하던 엄마는 곧바로 직장을 그만 두고 평강으로 가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한 달만에 해방을 맞았단다. 그 당시 선옥이 이모는 ('공출' 안 당하려고) 철원남국민학교에서 임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6.25와 서울 수복 후에는 효재국민학교와 홍제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시집을 갔다는 추억. 


해방 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엄마 말대로 달랑 보스톤빽 하나 들고”) 38선을 넘은 부모님. 이승만 정부 밑에서 요직에 있던 윤치영 할아버지 천거로 아빠는 경찰간부에 몸을 담았는데 건강을 잃어 경찰직을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가셨단다. 건강도 회복할 겸, 엄마도 3년 넘게 아기를 못 가져 의사의 권유도 있어서. 아빠는 제주도에 중학교 교사로 초빙된 몸이었고 3년 후 교장으로 채용되어 그뒤 무려 34년간 교장을 지내셨다. 그렇게 해서 1948년에 모슬포에서 오빠가, 1950년에 중문에서 내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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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엄마한테 가는 길은 거침이 없었는데 서울로 오는 길은 엄청 막힌다. 교통사고가 났는지 100번 외곽도로를 레커차들이 굶주린 하이에나떼처럼 내달린다. 앰블란스 소리는 한 참 있다 들려와 역시 사람 살리는 일보단 먹고 살아남는 일이 더 다급하구나!’ 했다. 차 세 대가 연쇄추돌을 한 사고현장에서 보니 맨 앞차는 뒷편 절반이 형체를 못 알아보게 짓이겨져 있었다.


오늘 가죽나무 순을 따다 추락사고를 당하고서도 사람은 하찮은 일로 죽고 살 수 있다고, 때론 큰일을 당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따라서 명줄은 저 위엣분이 쥐고 계시다고 하는 이치도 새삼 깨닫는 하루였다. 밤늦게 귀가한 큰아들 빵기를 맞고, 뒤이어 구총각이 들어오고, 보스코는 일찌감치 침실에서 코를 골고, 나는 뻐근한 명치를 쓰다듬으며 일기장을 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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