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24일 토요일, 맑으나 미세먼지 많음


아침 일찍 배밭에서 약치는 소리가 들린다. 전년 같으면 배나무 가지치기가 늦었다느니 작년에 비해 약을 너무 늦게 친다느니 내가 잔소리도 했지만 이젠 안 한다. 방조망을 치기 전해에는 그의 노동에 물까치의 입질이 도를 넘어 30그루의 나무에서 배 10개도 안 남겼고, 미루와 이사야까지 와서 방조망을 친 작년엔 유렵여행에서 늦게 돌아온 탓으로 '원앙'이라는 올배인 배나무는 배를 한개도 남기지 않고 다 떨군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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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올해는 배꽃이나 보고 나무 손질은 말아요, 3만원이면 한 상자 살 텐데, 그냥 남원 요한 선생한테서 사먹읍시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대답을 안했다. 나는 밭농사를 짓고 그는 배농사를 짓기로 잠정 합의를 했는데, 그걸 하지 말라는 말은 그의 노동을 거두어들인다는 말로 들렸나보다. 하기야 그도 나한테 양파 열 자루 나오면 다 남 주고 우린 한 자루 먹기도 힘들잖아? 감자도 마찬가지고? 농사짓지 마라!’ 한다, 힘만 들고 고생하는 게 안 됐다는 말뜻이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나 역시 난 아무 데도 생산 활동을 못하는구나하는 마음에 서글퍼질 게다.


하지만 20리터들이 질통이 무거워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면 역시 77세의 노인이다. 그래도 오늘 아침 약을 치고 올라오는 내 남편을 보니 생각보다 당당하고 힘이 있어 보여 억지로 말리지 않은 게 잘한 듯하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처럼, 저 배나무를 돌봐야 할 이유가 사라지면 그의 마지막 잎새도 떨어질 것만 같다.


머잖아 벚꽃으로 화사할 백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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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에 알고 있는 귀농 아저씨가 어제 트럭의 브레이크 파열로 차가 논두럭으로 쳐 박혔다고 전화해왔다. 다리와 바위에 사이에 바퀴가 걸려 목숨은 살았는데 차는 앞이 대파되어 폐차해 버렸단다. 벌어서 차를 사는 일도 시골 살림에 벅찬데, 차가 없으면 당장 농사짓는 일도 고될 꺼고 병원도 가야할 텐데... 걱정되어 당장 달려가 보니 그의 두 눈가가 검게 타있었다.


지난주에 농약을 치는데 분무기가 터지며 농약이 눈으로 뿜어나왔단다. 하느님이 인간의 눈을 얼마나 잘 만들어 주셨는지 눈 깜박할 사이에 눈꺼풀이 감기고 농약은 눈언저리를 새까맣게 태우더란다. 물로 깨끗이 닦고 닦은 뒤 이틀간 눈물이 쏟아져 내리더니만 실명은 안했단다.


작년에는 아들을 잃고 고된 시골생활에 술로 잠을 청하다 보니 알코올 중독이 되다시피 했다. 귀농해서 뜻대로 안되는 삶으로 시골사람 열에 여덟은 알코올 중독이 된다. 술만 안 먹으면 천하에 착한 사람인데 술만 먹으면 개차반으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이 많아, 견디다 못해 가출하는 여자도 있고, ‘얼마나 고되면 저럴까?’하는 마음으로 그냥 살아주거나, ‘나 아니면 저 인간 거지 되지하며 불쌍해서 못 떠나고 살아주는 여자들도 너무나 많다. 그에게서 농산물 몇 가지를 사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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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 들러 보니 귀농민 대장 연수씨는 먼 동네로 공부가고, 식솔들만 남은 상림공원 토요장터에 잠깐 들러 사과만 사들고 돌아 왔다. ‘만석지기안나마리아, 운산공소 아지메도 있었지만 머루즙도 감식초도 부각도 다 집에 있는 품목이라 사자니 그렇고 그냥 오자니 미안했다. 시골생활에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가 팔아서 돈이 될 것도 별로 없어 저렇게 볼품없는 것이라도 가지고 장터에 나오는 데는 그만한 절박감이 숨어있다.


나어린 까투리의 위험한 산보에 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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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크고 신맛이 적고 달기만 할 때면, 예전 빵기 빵고가 클 때는 사과잼도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사람이 없어 오후 간식으로 애플파이를 했다. 과자나 파이를 만들면 음식 자체의 맛보다 화덕의 온기와 거기서 퍼지는 과자냄새, 파이냄새가 더 매혹적이다.


그때마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학교에서 막 돌아온 아이들이 "엄마! 맛있는 냄새 나는데요. 뭐 만드셨어요? 배고파요." 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그리움이 배어 있다. 아이들은 모두 떠나고 그리움만 가득한 토요일 저녁, "여보, 애플파이가 아주 맛있어."하는 저 사람이 내게 마지막 남은 보물이다


보스코랑 저녁기도서를 펼치니 벌써 성주간! “어제 저녁 시편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이슬이 섬세한 손으로 밤을, 풀밭을 덮었는지” 하는 어느 시인의 느낌만으로도 고마운 휴천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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