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5일 일요일, 맑음


자고자도 졸립다는 빵고를 깨워 함께 아침기도를 하고 밥상에 앉았는데도 하품을 계속하는 걸 보니 시차적응이 쉽지 않은 듯하다. 우리도 유럽으로 갈 때는 시차적응에 어려움이 적지만 유럽에서 돌아와서는 여러 날 고생을 한다.


그걸 극복하는 방식도 각기 다르다. 보스코는 생체 리듬이 시키는 대로, 눈이 떠지면 깨어서 씻고 먹고 책 읽고 번역하고, 아침이고 낮이고 잠이 오면 그냥 누워 자는 무대책... 반면, 나는 오는 날부터 낮잠은 일체 안 자고 밤늦게 자고서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사흘이면 생리시계가 현지에 딱 맞춰진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일이 힘들어지니 나라 밖에는 나가지 말라는, 말없는 몸의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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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분에 실비아씨가 왔다. 착하디착한 큰아들이 인천에서 여기까지 엄마를 모셔왔다가 봉지 커퍼 한잔을 타 들고 수줍어 부지런히 발길을 돌린다. 그니는 이태석 신부님 마지막 해에 병상을 돌봐드리다 함께 병간하던 살레시안 부제들과 친하게 지낸 적 있어 오랜만에 귀국한 빵고신부를 보러온 길이다. 내게 밥하는 고생을 쉬게 한다며 초밥 5인분을 사왔다. 마지막 1인분은 우리집에 어제 입주한 새 집사 구총각 몫이란다. 내 패친이어서 우리집 돌아가는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엄마다운 마음 씀씀이가 그니 얼굴만큼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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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주일미사를 드렸다. 오늘 제1독서에는 아브라함의 늙어서 겨우겨우 얻은 금쪽같은 아들(“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누굴 놀리시는가요?)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실로 해괴한 하느님의 요구. 또 그런 지독한 말씀도 순순히 따르는 신앙인(“, 여기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러 산을 오르면서 하느님께 죽여바칠 짐승도 끌고 가지 않고 빈손인 걸 이상히 여긴 아들과 주고 받던 말.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누군가 가장 간절한 기도, 가장 절실한 구도의 자세는 자기 아들이 죽어갈 때 살려달라고 신께 비는 간절함이라고 했지만,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아들도 내어놓을 만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다니 온몸이 떨린다.


더구나 아브라함에게는 장작을 지고 올라가는 이사악 대신에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이라도 대신 잡아 바치게 배려하셨지만, 정작 당신 외아드님에게는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타 언덕에 끌고 가셔서도 끝내 숨지도록 손을 쓰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 심경은 어떠하셨을까? 아브라함은 늙은 아내 사라를 집에 두고 갔다지만 십자가 밑에서 까무러치지 않고 서계신 어머니 마리아는 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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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실비아씨랑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 작은 몸속에 농축돼 있는 놀라운 에너지, 그 힘겹고 거친 생을 강단 있게 헤쳐나온 용기, 살아남기 위해 처녀시절부터 무려 열두 가지 생업에 종사했다는 이력에는 혀가 내둘러진다. 빚으로 얻은 가게를 지켜내기 위해 삐끼를 하던 가냘픈 여인, ‘먼저 눈을 마주치고 웃어줘야 자기네 손님으로 가게에 들어와 주기에마술의 주문을 외우던 나날들은 참 눈물겨웠다. 삶은 늘 처연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어떤 자리에서든 누구에게서든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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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animalpeople/wild_animal/834007.html?_fr=mt3

"원앙은 정말 금슬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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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가 넘어 우리 둘은 우이천변 길을 함께 거닐며 산과 내, 청둥오리와 원앙, 송사리와 잉어들, 개천에 사는 그 숱한 생명들과 하나가 되어 또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니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주어진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살아낸다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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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 올림픽 폐막식을 보며 안도의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인류의 화합, 민족의 축전, 국민의 잔치에 끼어들지 못하고 저 잔치 망하기를 푸닥거리하면서 평양올림픽이니 하는 게거품을 내뱉던 추잡하고 더러운 정치인들, 한반도에 핵전쟁나기만을 학수고대하듯 증오에 찬 글을 쏟아내던 보수언론, 성조기를 두르고 날뛰던 늙은이들의 저 사나운 눈초리는 이제 또 어디 가서 시궁창을 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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