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1일 수요일, 맑음


빵고가 제주도로 터를 잡으러 떠나는데 유목민의 기본이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라면서 엄마가 와서 자기 짐을 좀 가져가달란다. 한 사람의 살림이 서너 개 보따리면 결코 많은 게 아닌데... 


하기야 선교사 원신부님처럼 한국에서 선교사 생활 20년만에 떠나며 (가방도 아닌, 보자기로 싼) 단봇짐 하나가 전부였다는 분도 있다. 그 보따리 속엔 갈아입을 수단 한 벌, 속옷 한 벌, 성무일도가 전부였단다. 달랑 그 보따리를 들고 한국을 떠나 남수단으로 가셨단다. 수도자의 모범이기도 하고 우리 인생에 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인생은 유목민의 삶이니 짐을 가볍게 꾸려라.' 더구나 우리처럼 남은 날이 적어 '천막을 거두고 떠날 차비'를 할 나이에는...


그 뒤 당신 조국 이탈리아나 한국에 오실 때에는 개나리 봇짐 대신 원신부님의 손에 깡통이 들려 있었다. 그 깡통은 나일론이라 사람들이 적선하는 모든 물건이 다 들어가 늘어나고 늘어났다. 이제는 깡통을 들고 비틀비틀 걸을 기운마저 없어 남수단 어느 판잣집에서 침대에 누워 계시단다. 가난하고 불쌍한 아프리카 청소년들 생각에 눈물만 흘리신단다. 그러니 수도자가 자기의 짐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그 자리를 타인에게 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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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스코가 전주 화산동 성당 이정석 신부님의 초대로 사순특강을 하러 전주엘 가는데 다른 때 같으면 당연히 내가 모시고 갔을 길을 KTX를 타고 가라 하고 나는 작은 아들한테로 갔다. 아들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도 억울하지 않으니 인간의 아버지다.


예전에 우리집에 드나들던 길냥이가 있었다. 흰색이 유난히 많고 눈주변만 갈색인 게 페르시안 잡종쯤 됐는데 내가 뜰에 나가면 계속 따라 다니기에 먹을 것을 한두번 주었더니만 그 뒤로는 아예 우리집에 눌러살아 내가 본의 아니게 고양이 주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고민은 그 순간 시작되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기 시작했고 어미는 새끼를 숨겨 키웠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수코양이가 숨겨 놓은 새끼를 물어다 마당에 죽여 내던지곤 했다. 다급해진 어미는 새끼를 물어다 애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두느라고 15장 높이로 쌓아놓은 연탄광으로 물어날랐는데 그러다 그만 연탄 사이에 한 마리를 떨궜다. 새끼를 연탄 사이로 떨군 어미의 다급한 울음과 어미를 찾는 새끼의 공포에 찬 울음이 아침 내내 집안을 소란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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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연탄 1500장을 들여놓고 말리느라 쌓아두었던, 창고 가득 한 그 연탄을 혼자서 4시간에 걸쳐 끌어내어 마당에 쌓고서, 맨밑에 떨어져 죽어가던 새끼를 꺼내 어미에게 내주었다. 그 새끼가 살아났는지 죽었는지 더는 볼 수 없었고, 제 새끼를 물어 죽이는 수코양이, 질투의 화신이 끔찍해 더는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


호랑이과에 속하는 모든 짐승은 수컷이 암컷에 대한 질투심으로, 자신과의 적대적

관계로 제 새끼들을 제거한다지만, 자식의 생명에 올인하는 아내를 못마땅해 비견하는 남자를 일컬어 울 엄마는 수코양이 같은 사내라고 부르셨다. 다행한 일은 우리 아버지도 보스코도 '수코양이 같은 사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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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고가 관구관에서 처리할 일이 있다 하여 기다리는 사이에 나는 식당에서 점심준비를 하는 그라시아씨를 도왔다. 그니는 손도 빠르고 요리사로서 기본자세가 되어 있어 무엇이든 배우려 하고, 배운 걸 열심히 활용한다. 빵고가 관구관에 있을 때 내가 이탈리아 요리 몇 가지를 그니에게 가르쳐 준 일이 있는데 관구관에 국제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요리를 해냈다며 고마워했다. 맛있고 정갈한 음식을 마련 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집에 사는 살레시안들은 힘든 일도 쉽게 해 낼 꺼다.


집에 오는 길에 면허시험장에 가서 빵고의 운전면허를 갱신하고, 걔가 은행일 보는 데도 같이 가고, 저녁도 걔가 먹고 싶다는 걸 같이 해먹고... 아들이 이렇게 좋다. 밤에도 아래층 자기 방에 침대 시트를 다 해 주었는데도 이층 엄마 가까이서 자겠다고 해서 거실에 요를 펴 줬다. 어린 시절 빵고가 저기 자고 있다, 우리 나이 마흔으로...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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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전주역으로 마중나온 이신부님과 본당 사목회장, 그리고 본당 수녀님과 함께 저녁을 대접받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사회교리라는 제목으로 90여분 동안 사순절 특강을 했단다. 강연 후에는 어느 사목위원이 제주에서 가져온 광어회로 잔치를 벌인 자리에 앉아 교우들과 얘기를 나누다 잠자러 간다는 전화를 해왔다. 제법 혼자서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다니 대견키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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