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16일 금요일, 맑음


어젯밤 호천이네 가져갈 짐을 차에 다 실어두고 눈만 뜨면 가려고 완벽한 준비를 해 놓았다. 혼자 있는 오빠에게도 오늘 같이 가자고 전화를 하니 버스타고 가려던 참이란다. 보스코가 힘들어 하는 걸 알았나? 아침 7시에 오빠네 골목에서 오빠를 태우고서 설잔치가 마련된 둘째 호천네로 떠났다.


오빠가 젤루 좋아하는 대통령이 노태우라니 전두환이나 박정희, 이명박그네가 아닌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잘 나가는 우리 이니때문에 속이 있는 대로 끓고 있을 태그끼아재와 촛불 동생(그것도 횃불에 가까운) 부부가 한 차 속에서, 끊임없이 막히는 차도를 가며, 공동의 대화를 못 찾고 단 1분도 멈추지 않는 정치적 훈화를 듣고 있노라면 머리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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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말수가 적어 남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다. 오빠랑 가면서 보스코는 요즘 오빠의 자취생활, 세탁, 청소, 집안살림 등을 차례로 물어 비정치적얘기를 유도해 낸다, 오빠가 신나게 풀어놓는 살림의 지혜는 어떤 여자에게도 추정을 불허하는 한계에 도전하는 10종 경기와 흡사하다.


우선 주변의 모든 재래시장을 돌며 가격조사를 마친 후 가장 싼 시장에서 가장 싸게 파는 미끼상품’, 예컨대 한 마리에 2천원씩 하는 닭 네 마리를 사서 절반씩으로 토막쳐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백숙, 도레탕, 전자렌지구이통닭을 한단다. 동태도, 돼지고기 등 모든 식자재가 봉지봉지 포장되어 냉동실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 품목과 래시피가 엄청무지하여 멀티풍션 한다는 내 여자 머리에도 과부화가 걸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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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예배에 참석한 두 명의 제3세대 진이와 원이가 지구상의 못된 젊은놈들’ 전부를 대표해서 지구상에 젤 가는 꼰대로부터 일장연설을 들을까봐 염려되어 오빠 설교 좀 짧게 해요!’라고 한 마디 했다가 호되게 역정을 들었다. 그가 입을 열면 동생들에게는 이빨이고 젊었을 적 직장에서는 탑재부독사로 불렸지만 그래도 오늘 아침 예배 설교는 좀 짧았다.


그래도 내 어린시절 오빠를 기억에서 불러내면 마음이 한결 포근해진다. 어렸을 적 그토록 자상하던 오빠. 다섯을 대표하여 큰놈으로서 아버지의 모든 꾸중과 혈기를 혼자서 무릅쓰면서도 아우들을 감싸던 오빠. 안성여고 시절 늘 내 책가방을 들어다주던 오빠. 대학시절 나랑 똑같이 용돈을 받아서도 아껴서 넌 여자니까 스타킹도 사신고 화장품도 사라!’며 돈을 주던 오빠. 장가가서도 엄마의 힘겨운 살림에 넉넉한 마음으로 목돈을 마련해드리던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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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40분에 모래내에 도착하니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고 앞니가 빠진 입모습이 장난꾸러기 초딩1학년 기집애마냥 귀엽다. 네 형제가 엄마께 세배를 드리고 쌍쌍이 마련해 세뱃돈을 올렸다. 정신이 예전 같지 않고 말수도 거의 없지만 돈봉투를 보시면 표정이 환해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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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니 이젠 너희들이 하렴하면서 사양도 한번 하시더니 일단 시작하자 청산유수다. 일산감리교회 수석장로님을 수십년 지내신 가락과 기돗빨이 여전하셔서 우리 모두가 감탄하였다. (97세 나이로 우리들 이름을 아직 기억하시고 심지어 백년손님보스코가 자기 이름을 묻자 `성염이`라고 정확히 대답하셔서 모두가 손뼉을 쳤다, 돌쟁이가 첫걸음을 내디딘 것처럼!) 엄마가 살아계시고 저만큼 건강하신 게 우리 다섯에게는 커다란 복이다.


3시에 호천네 집을 나와 4시에 안암동에서 내일 스위스로 가는 지인에게 빵기한테 보낼 조그마한 짐꾸러미를 전했다. 책 두권과 유과 조금이지만 멀리 타향에서 고향 설날 냄새라도 맡아 보라는 마음. 저녁에 페이스톡으로 세배를 하는 큰아들 내외와 두 손주를 보고, 내일이면 4년만에 로마를 떠나는 작은아들의 세배도 받았다. 설날도 아직 건재하신 엄마를 모시는 형제간의 잔칫상도  미루네와 두 아들네 전화세배도 하루와 함께 저물고 결국 둘이 남아 기돗상에서 '설날' 지녁기도를 올린다. 여하튼 모든 게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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