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11일 일요일, 흐리고 가끔 눈보라


어제까지 따스하다가 추우니 더 움츠러든다. 눈발이 간혹 날리는 새벽바람에 밤새 떨던 가로등도 꽁꽁 얼어 파아란 얼굴을 하고 있다. 도정은 설국을 이루어, 눈길을 내려왔다는데 문상을 지나자 딴 세상으로 눈이 안 보이더란다. 요즘 와서는 소나기만 아니라 눈도 국지성이어서 옆집에는 안 오는 눈이 우리집 동백 푸르고 매끈한 잎에는 소복이 쌓일 수도 있다. 세상이 워낙 어수선하고 불평등 하다보니 예전 같으면 온 동네 초가집들이 눈이불 하나를 함께 당겨 덮고 잠든 풍경이었는데, 이젠 그조차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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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공소에서 3분 거리. 부지런히 달려가면 안채에서 사랑채 가는 추위지만, 도정이나 운서에서 아래쑻꾸지 마을까지 오는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오기가 힘들 꺼다. 도정 스.선생님도 체칠리아도 없는 밤 혼자 심심해서 자정 넘어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늦게 잠드니 공소에 오기 힘들어 함양성당 낮미사를 가는가 보다. 미사 끝나고 이웃동네 또래 교우들과 단골 국숫집에서 한잔 하는 아가페 점심의 재미가 쏠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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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궂으니, 엊그제 연통마저 뽑혀나간 주물난로에서 끄으름 냄새와 목초액 냄새가 심하다. 암만 해도 오늘은 저 난로의 운명을 결정해야겠다. 도정에 새로 지어진 목조건물도 벽난로 때문에 지붕이 홀랑 타들어가 큰일날 번했다는 소식도 불길하다. 연통에 끼인 끄으름이 그야말로 숯덩어리여서 불이 붙으면 연통 자체가 불덩어리로 달아 지붕을 태우고도 남는다는 벽난로 전문가들의 경고까지 겹쳤다.


사다 놓은 지 3년이나 되어 기막히게 잘 마른 참나무도 아깝고, 겨울의 정취도 아쉽지만, 낭만적인 삶에 뒤따르는 목조건물의 화재위험이 너무 큰부담이요, 더구나 겨우내 목초액 냄새와 고약한 연기를 맡으며 말없이 고생한 아랫집에게도 미안하고, 창고에서 장작을 날라 주는 일 외에는 불을 지피든 장작을 넣든 굴뚝을 소제하든 도무지 나몰라라 하던 보스코도 마음은 안 편할 꺼고... 그래서 오늘 결단을 내렸다. 산청 이사야더러 이 주물난로 가져가라고 연락했다. 백만원 경비면 식당채 지붕에 구멍을 내고 연통을 새로 하겠다던 아저씨에게는 오지 말라고 당장 연락했다, 한두 시간 후 미련 땜에 마음이 또 바뀔지도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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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에 동의보감촌에서 미루네와 만나 점심을 하고, 산청 왕산을 넘어 동강으로 돌아오는데 천천히 움직이니 많은 것이 보였다. 산자락 아래 나지막하게 엎드린 마을들, 흐르는 강물에 얼음을 깨고 발을 담근 바윗돌들, 얼음 사이로 먹이를 찾다가 힘없는 날개짓으로 날아오르는 해오라비들, 샛파람에 몸을 흔드는 갈대들의 몸춤.... 휴천재에서 다과를 든 다음 난로와 내화 벽돌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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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에 들어서자 눈발이 갑자기 굵어지고 우리 네 사람의 낭만은 더 섬세해진다. 미키스 테오도라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 나나무스쿠리, 멘데스 수사, 죤 바이스 등 저항시인들의 노래를 눈발에 곁들여 들으면서 무드성보스코는 김용택시인의 `칠보에 오는 눈`을 낭송하고 내 핸폰에서는 바씰리우의 카테레니행 기차가 여덟시에 떠나가고. 귀요미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들려주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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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벽난로 자리에 아주 오래 기억 될 오후가 내리는 눈이 되어 추억으로 쌓였다. 미루네가 떠나고 나서, 나는 연통구멍 자리에 못을 박고 사다리를 타는데, ‘수납의 왕자보스코는 식당에 있는 옷장 속의 식탁보들과 잡다한 것들을 꺼내 정리한다. 2층 마루방에는 진짜 벽난로도 있어 언젠가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아궁이 속에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우리를 추억하며 행복해지기를 꿈꾸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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