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4일 수요일, 맑음


옆산 갈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마저 차갑다. 해가 뜨면 2층에선 빛살이 세탁기가 놓인 북쪽 끝까지 들어와 웬만한 추위엔 난방기구를 꺼버리는데 오늘은 유리창으로 비치는 게 따스한 태양이 아니다. 체감온도가 영하 23도라니 집밖은 내다보지도 않게 된다. 마당 눈도 어제 그대로 포근한 아침을 맞았다.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 되어 눈 오는 날... (이해인, 겨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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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운날 긴긴밤이 심심해 친구 한목사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이주여성 인권센터 총회에 오느냐? 거기서 보자.’ 전화기 저 너머에서는 다 죽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B형독감이 걸렸다는데 바이러스가 그니의 작은 몸에 득시글거려 딴 사람들에게 옮길까봐 가야할지 고민 중이란다. ‘제발 오지 말라. 나도 그대랑 친하지만 바이러스는 싫다. 오지 말라고 답했다


다미아노 성인은 몰로카도에 자청해서 파견되어 나환자들을 돌보며 평생을 함께 지내다가 당신도 나균에 감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는데... 드디어 자기도 '문둥이'가 되고 그들이 죽어가는 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알게 되었노라며 반겼다는데... 하지만 성인도 B형독감은 싫어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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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추운 날은 따뜻이 볕드는 식탁에서 뭔가 프라이팬에 자글자글 끓는 음식이 먹고 싶다. 몸보다 마음이 추울 사람들 생각도 한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람들, 남에게 고통을 주고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 사람들.... 언니가 보내온 카톡 메시지가 자꾸 맘에 걸린다. ‘야무지게 입어요.' '감기 걸려요.’ 이젠 이런 말을 건네줄 사람마저 없어서 더 춥겠지...


내일 회의장에 가려면 아무래도 병원엘 한 번 더 가서 주사라도 한 대 맞아야 할 것 같아 온몸을 꽁꽁 싸고 집을 나왔다. 가오리에 있는 선내과엘 가자면 교통편이 참 복잡하다. 큰길까지 걸어가 우이선지하철을 한 구간 타고내려 다시 걸어서 가는 거리나, 아예 집에서부터 그냥 걸어가나 시간은 비슷해서 걸어가기로 했다. 마을주차장을 지나는데 전보다 많은 차들이 서 있다. 아마 차주인들도 오늘은 집에서 쉬거나 대중교통으로 출근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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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저렇게 그늘에 세워진 차 사이로 언뜻 보이던 작은 머리 하나. 깜짝 놀라 왜 거깄냐?’ 물으니 오늘은 아빠가 오시나 기다려요하던 현철이! 엄마는 일찍 집을 나갔고 막일하는 아빠는 먼데로 일 나가서 며칠 몇날을 안 들어오면 일곱 살 꼬마는 라면을 날로 씹어 먹으며 연탄불마저 꺼진 찬 방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 인연은 시작이 돼 동네아줌마들이 번갈아 끼니를 챙기며 취학을 주선하고 보살폈다


그게 20여년전 일이니 걔도 이젠 30대 바라보는 청년이 되어있겠다. 제발 그 가난과 외로움이 대물림되지 않기를 빌면서 걔가 생각나 찬바람 부는 주차트럭 뒷편에 행여 누가 있나 기웃거리게 된다.


지난번과는 달리 병원엔 환자가 몇 안 된다. 노인들 독감이 나았는지, 오늘처럼 깡추위엔 외출하면 큰일 난다고 단속을 받았는지 대기실이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이어서 사모님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따님 공부에 동행하느라 5년간 러시아에서 견뎌야 했던 영하 35도 강추위 얘기를 들으니 오늘 이 정도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며칠 후면 추위가 가시리라는 희망이라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우린 정말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


콧김에 하얗게 서리 낀 안경을 쓰고 집에 들어서니 보스코가 마루에 깔아놓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란다. 따끈한 이불 속 녹아가는 몸이 감기기운으로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든다. ‘행복하다. 행복이란 본디 이렇게 단순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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