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9일 금요일, 맑음


한국에서, 더구나 여성 차별이 큰 남도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일, 여자가 여자를 낳는 일은 이미 큰일이다. 내 친구는 세 형제 집 둘째 며느리. 큰며느리가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고, 친구랑 막내동서는 딸만 둘이었다. 제삿날이면 친구에겐 고문의 날. 큰동서는 아들 난 유세를 있는 대로 떨며 젯상 앞에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세우며 "자아, 딸들은 다 나가고 아들만 절해라." 큰소리쳤단다. 그때마다 속이 뒤집혔던 친구는 막내동서더러 "우리 죽어도 아들 낳세!" 했단다.


그러던 중 둘째와 셋째가 나란히 아이를 가졌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꼭 아들을 본다는 보장도 없던 그니는 친정언니가 딸 셋을 낳고 넷째를 가졌는데 어디 가서 뱃속 아이의 성별을 알아보고 또 딸이면 낙태하자더란다. 남도 끝에서 수원까지 갔고, 역에서 봉고차가 기다렸다 산부인과로 실어가더란다. 불법 낙태시술소였다! 진료 후 여아면 그 자리에서 낙태를 해주고 (20여년 전 일인데) 100만원을 받더란다. 언니는 독하게 마음먹고 그 자리에서 수술을 했고, 마음이 여린 내 친구는 자기를 찾아온 아이에게 차마 죄를 지을 수 없어 그냥 돌아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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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드디어 셋째로 아들을 낳고서 천하를 다 얻은 표정이었는데, 열흘 늦게 분만을 했던 자기는 심장이 녹아나는 초조함을 거쳤단다. 결국 자기도 아들을 낳고서 "대한민국 만세!"였다는데 그런데도 임시키가 두 딸 효성엔 발뒤꿈치도 못 따라온다니까라는 게 요즘의 한탄.


이렇게 여자라면 태어나면서부터 하대받고 자라다보니.... 어제 우리 여자끼리 독후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몸을 떠는 친구가 여럿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소리를 못 내고, 동료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모처럼 용기를 내어 변호를 했다가도 사람들의 질시 속에 자라목이 되어 다시는 남의 일로 나서지 않겠다결심을 하게 되더란다. 작년 겨울 행여 자녀들이 촛불집회에라도 참석하려 하면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으니까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말렸다고 고백했다.


지난 달 아랫집 진이가 낳은 아기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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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독서회 친구들의 놀라운 발전과 변화를 지켜본 나로서는 그들이 자기처지를 깨달음과 동시에, 우리보다 약한 이들의 처지에 눈뜨고, 그 부당함에도 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박감을 품어가는 효과를 목격한다. 이 지구에 슬픈 아이, 슬픈 여인, 슬픈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한 우리 양심은 불편해야 옳다. 우리 여성은 온 인류에게 어머니로서 태어나는 까닭이다.


점심 후 오랜만에 산보를 나갔다. 문상으로 올라가다 태우할머니를 만났다. 한 겨울이 지나 아직도 살아계신 어르신들을 보면 봄에 새싹 만나듯 반갑고 마음이 놓인다. 태우가 군복무를 마치고 공군 하사로 말뚝을 박았다고, 외손주 친손주 모두 무탈하게 군대를 다녀왔다고 자랑이다. 이 지리산 속에서 좌우의 대결 속에 스러져간 젊은이들의 기억, 토벌한다고 출몰하던 군인들의 기억이 생생한 할머니로서는 가슴 쓸어내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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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막길로 오르다 강건너 진이네 펜션을 보니 이한기교수 부부가 방곡에 집을 짓느라 그 팬션에 묵는다는 사실이 기억나 전화를 했다. 마침 공사장 일을 마치고 들어온 길이라 해서 찾아갔다. 이교수는 로마대 건축과를 나와 교수를 하다 은퇴를 했고, 부인 승임씨는 인도미술을 전공한 분으로 로마 아카데미아에서 발달장애아들을 돕는 미술치료를 공부했다. 우리가 로마에서 두 사람을 처음 만난 게 1981년도, 긴 세월을 함께한 친구다.


휴천재도 이교수가 설계해 주었다(설계비로 토종꿀 한 병을 드린 게 전부!). 그가 설계해준 집은 이 산과 계곡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림이었지만 집짓는 사람들이 함양에서는 이렇게 안 지어요!’라면서 초등학교 교실이나 면사무소 형태로 뜯어짓고 말아서 이교수에게 우리집을 보일 때마다 미안했다


부부가 기도하고 명상하며 사는 분들이어서 비록 5년 만에 만났어도 엊저녁에 헤어진 친구같이 반가움은 두 사람의 해맑은 영혼이 우리에게 부럽고 그리워서였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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