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일 수요일, 맑음


시골 살면 이웃 어메들이 자기 집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냥 빈손으로 안 보내고 뭔가 손에 들려준다. 그게 집에서 만든 두부일 때도 있고, 가을 내 아픈 다리 끌며 산비탈을 기면서 산 골짝 다람쥐처럼 한줌씩 모아온 도토리를 껍질을 까고 갈고 짜고 녹말을 가라 앉혀 말려두었다가 쑨 도토리묵일 때도 있고, 땅콩 한줌, 밥에 놔먹으라는 서리태 한 봉지, 울타리에서 저 혼자 나서 커서 터지기 전 아슬아슬하게 건져진 울타리콩이기도 하고, 밥에 섞어먹으라는 찹쌀 한 홉일 수도 있다. 여하튼 손님을 빈손으로 안 보낸다.


남도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과 함께 실린 함양 오도재 (경향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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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가 다양한데 모조리 검정 봉지에 담겨져 건네진다. 즉시 먹기도 하지만 나머지는 부엌 찬장 한켠에 놓인다. 그러다 서울까지 가져온 봉지 몇 개에 호두알들이 한줌씩 들어 있었다. 다람쥐인지 청솔모인지 물어다 땅에 묻어 감춘 곳에서 싹을 틔우고 자란 호도나무는 모두 토종이고 맛도 좋지만 크기가 은행알보다 좀 나은 편이어서 받아는 오지만 까먹을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아침부터 이층 싱크대 서랍과 냉장고를 정리하던, ‘우리집 정리계의 왕자보스코가 그 호도 봉지들을 내밀며 버리든가 먹든가 하란다.


", 꼭 오늘이어야 돼?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는 전순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전순란도 때론 영원한 미래를 믿는 일도 있다구!” 구시렁거려보지만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건 아까워서 하는 수 없이 호도까기를 손에 들고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오전 세 시간 반을 까고 나니 집에 있던 호도는 다 처리됐는데 알맹이는 조그만 글라스락에 하나도 안 된다. 감기 기운으로 온 몸이 쑤시고 아프고... 토종 호도는 앞으로 사절! 수취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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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동 집 이층은 해만 나면 난방을 꺼도 25도는 너끈하다. 이런 따사롭고 평화로운 태양 아래서 속편하게 읽기에 미안한 책을 읽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서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라는 소개글이 제목 밑에 붙어 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역자다.


1979년판으로 청아출판사가 발행한 책이다. “...깨우쳐주는 요법이 있었던 것인지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말을 이렇게 꼬나?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다거나 매우 의심스럽다라고 쓰면 되지? 너무 속이 터져 역자의 약력을 보니 경성제대'를 졸업했다완존 노틀그 책을 포기하고 수유리 중고서점 알라딘에 달려가서 같은 출판사가 2005년에 이시형 역으로 다시 펴낸 책을 또 샀다책이 술술 읽히고 내용이 머리에 꽂히듯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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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번역을 본업으로 살아온 보스코, 오늘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펠라기우스 논쟁의 어느 서적에 해제를 쓰고 있는 보스코의 등을 보면서 행여 내 남편도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는데...’ ‘동업자끼리 이렇게 씹어서는 안 되는데...’ 반성도 하고 당신도 이런 얘기 안 들으려면 잘 하라구요!’라며 잔소리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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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통령의 신년기자 회견을 들으며 기분 좋았던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다. 이명박의 김태영 전국방부장관의 쇼, ‘UAE 원전 수주를 우리한테 주면 우리 젊은이들 목숨도 내드리겠소!’하는 밀약이나, 국정농단 재판을 정치보복이라며 버티다 국정원에서 받아챙긴 현찰을 빼앗길 것 같으니까 박근혜가 부랴부랴 이영하를 변호사로 다시 선임하는 짓이나 '그 둘에게 최우선은 돈이었구나! 그들에게는 돈이 하느님이고 백성도 헌법도 안중에 없구나!' 탄식하게 된다.


반면에, 오늘 신년 기자회견에서 거침없고 자유자재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지난 봄 문대통령이 빵고신부에게 써준 당신의 좌우명 `인간이 먼저다`(빵고 친구들은 흘려 쓴 그 글씨를 `사람이 되거라`라고 읽어주면서 빵고를 놀린단다)를 보면서 흡족한 심경으로 묻고 싶어진다. “우리 촛불이 기다리던 사람이 당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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