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3일 금요일, 맑음


날씨도 선선하고 하늘은 푸르고 높아 걷기에 딱 좋은 날.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걷자고 아무리 졸라도 일이 바쁘다는 보스코를, 미루의 애교에 찬 전화목소리를 힘입어,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다. 솔밭공원으로 가는 다른 길이 있지만 빨리 가려면 덕성여대를 통과해야 한다. 구내 우체국에 들러 지금 바티칸에서 개최되는 한국교회사 전시회 도록(圖錄)을 경세원에 부쳤다. 전시회를 현장 지휘하는 복자회 엘리사벳 수녀님이 보내주신 고마운 자료다. 나는 그동안 안경점에 들어 다리가 흔들리던 안경을 바로잡고....


산보는 한길 건너 북한산 둘레길에 있는 보광사까지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있는 우이동 솔밭 공원’. 90년대말 우리가 지켜낸 솔밭은 오늘도 벤치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할머니들, 고무로 만든 이상한 모형의 신형딱지로 딱지치기를 하는 아이들, 놀이터의 어린이들, 주삣주삣 걷는 영감님들, 열심히 뻐꾸기시계 추처럼 뱅뱅도는 소녀 목각인형들처럼 솔밭 산책로를 열심히 도는 뚱보아줌마들로 가득 차 있다. 보스코가 느닷없이 "이 솔밭 공원을 지켜 내느라 당신이 얼마나 고생 했는지 저 사람들은 과연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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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도 더 된 일이니 알 턱이 없다. 알든 말든 우리는 그때 건영아파트를 그 자리에 짓겠다는 건영측과 수년간 싸웠고 결국 이겼다. 정확히 말하면, 전순란과 김말남의 표어대로 이길 때까지 싸웠다.’ 그래도 당시에는 언론의 지원, 특히 중앙일보의 보도가 주효했다. 채벌이 금지된 소나무 밭이어서 한 그루 한 그루에 구멍을 뚫고 나무를 죽이던 행태를 발견하고 사진촬영, 고발하고 데모하고 진정도 하고....


솔밭을 지나 좀 올라가면 북한산 둘레길이 나타나고 이어 ‘419 묘역이 내려다 보인다. 목숨을 내놓고 자유당 독재정권과 싸워 역사를 다시 쓴 분들 앞에서 솔밭 지켰다는 명함을 내밀기는 사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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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보광사가 있는데 지금은 벌써 초딩 5학년으로 자란 시아가 유모차를 타고 올라온 곳이다. 걸려서 유모차에 태워서 올라온 아기가 대웅전 현판 앞으로 솟아난 용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던 일이 생각난다. 애들은 커서 떠나가며 잊어버리지만 우리 늙은이들은 불쏘시개로 언 손 녹이듯, 추억의 조각들을 모아 서늘한 가슴을 덥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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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휴천재 오기 좀 전 한남마을 산비탈에는 파라다이스라는 민박집이 있다밤이면 그 언덕의 고요로움을 붉고 푸르고 노랑 싸이키 조명으로 어울리지 않게 하는데 그 집주인이 자기가 보광사를 지은 목수라고 자랑한 적 있다. 멋진 건물이 있으면 저것 지은 게 바로 나라는 사람들이 한둘 아닌데 시공자도 대목도 공사장에서 등짐을 몇 번 지었거나 못질을 몇 번 했어도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


역사에서도 실상 대목(大木)을 한 사람은 산화하여 사라지고 곁에서 '시다'를 하거나 몸을 사리던 구경꾼들만 살아남아 그 보람을 나누어 챙기는 법. 살아남았다는 게 오욕임을 고백해야 할 순간이 많은 우리역사다. 박근혜에게 영장이 재발부된 것은 참 다행이다. 가짜 목사까지 만들어 교계에 침투시킬만큼 정보부의 거의 모든 역사와 활동이 범죄와 양아치짓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솔밭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최근 개통된 우이동과 신설동을 잇는 경전철 구경을 갔다. 전철역도 에스컬레이터도 전철도 모두 미니사이즈. 신설동까지 간다니 내가 이주여성인권센터에 회의하러 갈 때 편하겠다.


효소절식의 보식을 하면서 오늘부터 밥을 먹은 보스코는 기분이 훨씬 좋아 보인다. 나도 보식을 시작했다. 몸도 가볍고 정신도 맑은데 눈은 좀 침침하다. 눈은 나보다 더 좋으신 울 엄마한테 전화를 하면 거의 안 받으시는데, 이번에 호천네집에 오셔서는 "나 여기 있으면 안돼?" 라고 물으시는데 가슴이 아팠단다, ‘유무상통이 엄마 집이고, 지갑도 거기 있고 지갑 속에 돈도 거기 있어요.’라며 달래어 모셔다드렸지만.... 어떤 사랑도, 그 실행은 늘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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