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2일 목요일, 맑음


'저 남자는 참 속편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두 달 전 서양고전학회정암학당에서 로마문학 개요를 발표해달라는 청탁을 받았고 자기가 전공한 분야여서 선선히 응낙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귀국해서 발표 한 달 여를 앞두고 발표문을 준비하려고 어제 오늘 자료를 찾았는데, 그 자료박스를 수십년 갖고 있다 작년에 폐지로 처분했던 사실을 기억해내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보스코... 학자로서 이제 와서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횡설수설로 넘길 뱃장도 아니고...


내가 가만히 다가가서 안아주며 여보, 천하의 성염이 못하면 누가 하겠어요? 자료야 어디선가 찾으면 되고, 당신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더 잘 헤치고 나가잖아요? 힘내요 아자~" 하니까 내 몸짓에 빙그레 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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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싫어해 '티벳요가' 역시 내가 조르고 어르고 구령을 붙여줘야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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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부'는 늘 자발적이어서...ㅋㅋ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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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의 모교 교황립살레시안대학교) 라턴문학과 학장이 빵고가 묵는 공통체의 부원장이지?" 하는 생각을 해냈다. 지난여름 그 공동체에 초대받아 점심식사를 하며 정답게 얘기를 나눴던 분으로 빵고와도 친하게 지내는 분이다. 때마침 현지시각은 점심시간이어서 빵고에게 카톡전화를 걸어주었다. 빵고는 마침 옆에 계신다며 미란 신부님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신부님은 기꺼이 충분한 자료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였고 그제야 보스코는 활짝 웃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어선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칫 털썩 주저앉는 보스코. 그러나 아무리 큰 어려움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책임감과 자긍심은 대단하다. 게다가 살레시오 신부님들에게서 늘 격려를 받으면서 커왔기 때문에 자신감도 있다. 주저앉았을 때 손을 내밀어 일어나게 해주면, 잘 달리지는 못하지만, 끝까지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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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서도 서울서도 바쁘다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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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골학교 교장 딸로서 애들의 부러움을 받고 자랐다. 누구 앞에서도 거침없이 행동했기에 안성여고 1학년에 들어간 해 첫 봄소풍에 교장선생님 앞에서 얼마나 격렬하게 트위스트를 추고 톰 존스 노래('딜라일라'?)를 얼마나 신나게 불러 제꼈던지 교장선생님이 쟤 누구야?’라고 물으셨고 그 지역 교장회의에서 울 아버지를 만나 놀리시더란다, "전교장네 딸 물건이야!" 집에 오신 아빠가 그 소문을 두고 나를 나무라시긴 했지만 내심 흐뭇하신 표정이 역력했다.


더구나 어깨였던 오빠가 이웃에 있는 안법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어떤 남학생들도 찝쩍거리지 못했고, 오빠 역시 나를 끔찍히 위해주며 가방이 무겁다며 등굣길에 늘 내 가방을 들어 주었다. 대학 때도 같은 액수의 용돈을 부모님에게 받아도 월말에는 얼마간 남겼다가 스타킹 사 신고 화장품 사라며 꼭 내게 건네주곤 할만큼 오빠는 다정다감했었다.


50년 세월이 흐르고나니 지금은 남동생들에게도 '이빨'로 불리고, 비록 태극기집회에 나가서 태극기를 일곱 개나 가져다 집안 구석구석에 꽂아놓고 꼴보들의 유인물을 탐독하고 있어도 그런 오빠가 나는 여전히 좋다. 나로서는 그를 욕할 수도미워할 수도 없다.


오전에는 석 달 동안 밀렸던 공무를 책상머리에서 전화통을 들고서 다 처리했다. 자기 공부외엔 아내에게 죄다 떠넘기는 남편 덕분에 숙련된 '맥가이버 걸'이다. 우선 그간 정지된 의료보험 살리기, 신용카드 분실로 생긴 전기 전화 자동이체 복원, 만기된 자동차보험 갱신, 단절된 운전자보험 회복, 소매치기 당한 신용카드 재발급, 우리차 운전을 위한 빵기의 자동차보험, 바닥 떨어진 등산화 비브람 깔창 갈기, 압력밥솥 뚜껑의 증기부속 갈기....


오후엔 안 부지점장에게 가서 예금통장을 정리하여 박총각 전세 나가는데 전셋돈 송금을 했다. 올케언니를 찾아가 속사정과 속얘기를 듣고, 점심도 못 먹은 언니가 먹고 싶다는 빈대떡 만들어주고 왔다주저앉고 말았을 때 서로 손을 내밀어 일어나게 해주면잘 달리지는 못해도 끝까지는 달리는 게 부부련만.... 집에 올라와서도 알타리 김치를 담고 빵기방을 청소하고.... 효소 절식을 계속하느라 맹물만 마시고서도 무지하게 많은 일을 해치운 기분이다


보스코는 배고픔을 못 참아 그나마 보식으로 두유 A생생2’로 허기를 채우지만 그 역시 출판사에서 금년 말에 낸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獨白)’의 교정쇄를 보고, 제주 강연을 준비하고, 고전학회 강연을 메모하느라 바쁘다. 우리 둘 다, 말하자면 인간승리. 오늘 밤엔 숙면할 자격이 있다. 자정 무렵 들어온 큰아들도 집에 있겠다....


인생의 황혼이면 저 두 그루 치프러스처럼 부부가 나란히 일몰을 맞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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