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6일 금요일,


"여보, 왜 대추를 한쪽만 따고 보일러실 지붕 쪽은 그냥 놓아두었어?" 대추를 따 보았자 거의가 벌레 먹고, 곱고 잘 익었다 싶어 돌려보면 꼭 새가 먼저 한 입질을 하고난 후다.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으니 올 대추 농사는 꽝이다. 그래도 비를 맞아가며 보일러실 지붕에 올라가 우산을 거꾸로 펴들고 장대로 두들겨 따다가 어제 것과 함께 하나하나 골라가며 씻어서 쪘다. 쪄서 말리면 빛깔은 덜 곱지만 벌레 나는 걸 방지하고 또 빨리 마른다.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하자니 하기 싫은 마음도 들었다. 작년 대추가 남았으니 그건 우리가 먹고, 지금 손질해 놓으면 누군가 먹겠지 했는데 바로 가져갈 사람이 생겼다. 오늘 바로 휴천재의 수세미 열매, 텃밭의 약초를 캐다가 효소를 담겠다고 오신 성삼회 수녀님들이 쪄놓은 대추가 너무 달고 맛있다며 기꺼이 가져가셨다. 대추 말릴 수고를 덜 수 있어 다행이다. 말려도 어차피 누구에겐가 줘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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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에 국수녀님과 두 분 수녀님이 오셨다. 마침 오늘이 창설자 치마띠 신부님(가경자) 축일인데 기념미사를 드리자마자 부지런히 달려오셨단다. 간단히 간식을 하고, 노동복으로 갈아입고, 목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고 텃밭으로 내려가셨다. 신선초, 참나물, 자소엽, 어성초, 심지어 까마중, 달개, 가시엉겅퀴도 효소에는 소중한 약초란다.


보스코도 약초 담을 상자를 나르고, 자소엽을 잘라서 큰 비닐봉지에 담으며 일손을 돕는다. 그는 수녀님들에게서 모발샴프를 얻어 쓰는 중이고, 그 덕분에 대머리로 벗겨진 뒤통수에 머리털이 꽤 많이 새로 났다. 어성초, 자소엽, 녹차잎이 그 원료라니 대머리로 고민하는 남정네들이 수녀님네 약초로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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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들이 약초를 베는 사이에, 나 없는 동안 우리 텃밭에 배추와 무를 심고 돌봐준 드물댁에게 인사치레를 하러 갔다. 우리 공소 마르타 아줌마가 함께 있다가 반갑게 맞는다. 열댓 명밖에 안 되는 공소다 보니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빈자리가 커서 서로 챙기며 기다리게 된다. 아줌마는 누가 우리 배를 따 먹어보니 물도 많고 맛있더라며 주인 올 때가 멀었으니 자기더러도 좀 따다 먹으라 했는데 소문이 어찌 날지 몰라 차마 못 했단다. ‘그럼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따다 먹어서 열매가 그리도 없었나?’ 살짝 의심이 일다가도 그렇게라도 따다 먹었다면 배나무로서는 최소한의 소임을 다한 셈이어서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실상사 앞을 지나오다 작은수녀님이 길섶 카페에서 구절초 축제현수막을 보았나보다.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해서 수녀님들과 들국화 축제를 보러갔다. 소나무 숲에 구절초 작은 꽃들이 하루 종일 내린 가을비로 말끔히 얼굴을 닦고 화안하게 우리를 맞는다. 우리는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고, 작은수녀님은 어떻게 당신네 뜰에도 가을이면 구절초가 저토록 흐드러지게 할까 열심히 궁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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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을 보니 가수 수니와 이원규시인도 다녀갔다. 전망대에 올라 어둑해지는 지리산을 바라봤지만 천왕봉은 구름이 숨겨 놓고, 마천쪽 골짜기만 살짝살짝 몸을 튼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식당에 들어가니 일하던 사람들은 5시에 다 돌아갔다고, 민박하는 사람들의 바비큐 저녁만 한단다.


올라오면서보니 실상사 앞 식당들도 빗속에 다 닫혔고 수녀님들을 고픈 배로 그냥 보내야 할 것 같아 염치불구하고 나섰다. 김치에 국밥만 주면 된다, 설거지도 해놓고 가겠다 사정을 하니까 길섶 카페 촌장 모친께서 "밥 있는데 어찌 사람을 맨입으로 보내노?"라며 육개장, 비지찌개, 열무김치, 두부김치로 한상을 차려주신다. 역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리는 지하여장군. 배불리 먹고서 설거지를 해놓고, 기분 좋게 이슬비를 맞으며 구절초 꽃길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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